방금 뭐 숙제 낼 거 있어서 했어요 어렵더라고요 ㅠ 그 진짜 그걸 많이 느껴요 시간관리도 능력이다.. 지각했던 게 지금 생각해봐도 여유가 없으니까 늘 그렇게 짓눌린 상태에서 살아와서 그런 것 같아요 밀리면 안 되더라고요 근데 뭐.. 대1~이번까지 매번을 막 밀리면서 살았으니.. 지금도 순간 순간 느끼는 게 매번 너무 딱 맞춰서 하더라고요 여유 있는 상태로 움직이는 게 진짜 어려워요 마음에 되게 깊게 각인이 됐어요 금요일날 졸업 사진 찍거든요 졸업용 증명사진을 찍어요 저희는 대학이 외국이라 중국 사이트에서 졸업장이랑 학위증을 다 뽑아야 하거든요 그때 쓰는 사진이에요 금요일날 세시부터 세시반까지 학교 건물에서 찍거나.. 근데 애들이 170명이거든요 아니면 따로 사진관 가서 찍어야 돼요 지금 사실 숙제 하고 피곤해서 제대로 보진 않았어요 애들 보고 이러는 것도 불편하고.. 엄마는 그냥 학교 가서 찍으라고 하시던데.. 제가 사실 별로 안 가고 싶어요 내일 아침 10시에 과외 있고 오후 1시에는 수업을 가요 수요일날 12시반에 또 과외가 있어요 수요일이 공강이라 바짝 봐야 돼요 금토에 또 있고요 금요일 오전 9시 토요일 오전 9시. 그래서 사실 시간이 없기도 해요 30분이라고 해도 더 걸릴 것 같아요 170명이니까.. 내일까지만 다시 고민해볼게요 ㅠ 학교에 너무 정이 없네요..ㅠㅠ 애들이 좀 불편해요 그 많은 데 가서 찍고 싶지도 않고요
나는 그냥 글러먹었어. 사고 방식부터가 답이 없어. 아니 그냥 나 자체가 답이 없어.
그냥 죽고 싶다. 뭘해도 살아있는 게 그냥 고통이야.
우리 고모는 뭐 하나 조금 잘못하면 엄청 혼내고, 다른것도 끌여당겨서 혼내신다. 그래서 뭐 시도하기 무섭다. 도전은 개뿔. 혼나면서 배우기엔, 내 멘탈 개 약해ㅋ 아 괜히 죽 할 반찬 먹고, 신발 질질 끌었어. 결론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고, 뭐 행동 할 때마다 *** 눈치봐야되네. 내가 눈치보는건 다 고모 때문인듯. 암튼 기분이 조금 안 좋음. 심기 불편하게 만드는 기준이 매우 낮은듯. 독립도, 취직도 안 하고 싶은데 고모는 하라네.. 실패하고, 깨지고, 책임지는거 무서운데 힝.. 그러면서 사는 거라지만..난 못하겠다ㅋ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그러기 싫다..진심 어쩌지..
아무리 부정하고,도망쳐도 현실은 부정되지 않았다.
친할아버지 장례를 마쳤다 할아버지의 부고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이상하리만치 아무 감정이 안 들었다. 뇌에서 사실을 자각하기도 전에 가슴이 부정하는 느낌이었다. 그냥 할머니 댁 가면 늘 계시던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계실 것 같았다. 눈물은 커녕 정말 아무 감정도 안 들어서 그냥 찬양을 틀고 조용히 묵상했다. 모든 고생 걱정 내려놓고 주님 품에 평안히 안기신다는 사실이 다행이란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우리 집 창문으로 할머니댁 안방이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 살았기에, 장례식을 준비하기까지의 과정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어서 신속하게 진행되는 줄 알았는데 할게 정말정말 많았다. 과학수사대의 부검, 목사님 방문, 장의사 방문, 장례지도사 고용 등등 어른들이 매우 바쁘게 움직이셨다. 그동안 부모님께선 아무 말도 없으셨고 반 쯤 걸쳐놓은 이어폰 사이로 혼자 조용히 상황을 파악했다. 상주로 장례식에 가는 건 처음이었어서, 뭣모르고 공부할 것들을 가방에 가득 챙겼다. 가자마자 상복을 입고 프론트에서 조문객분들을 맞이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어서 바싹 긴장했고, 그때까지 내 머릿속엔 '공부해야하는데' 란 생각 뿐이었다. 정말 전혀 실감이 안 나고 할머니와 고모, 아빠가 우시는데도 아무 감정이 안 들었다. '할아버지는 살아계시는데, 댁에 계시는데 왜 우실까?' 란 생각이 들었다. 첫째날은 그렇게 바쁘게 마무리됐다. 둘째날, 점심때를 맞춰 동생과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입관예배와 입관식이 있는 날이라 아침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오늘도 식장에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고, 오랜만이라며 안부인사를 서로 건네는 모습에 결혼식장인지 장례식장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사촌동생과 프론트를 지키고 있었는데, 사촌동생이 침묵을 깨고 한마디 말을 건넸다. "여태 모자 쓰고 계셔서 잘 몰랐는데, 할아버지 영정사진 보니까 되게 잘생기셨었네." 그 말에 나도 할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미소가 정말 고우시다. 보고싶다. ' 만감이 교차했지만 슬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자각이 안 됐고, 사촌동생도 나랑 같은 생각이었다. 아빠가 우는 걸 어제 처음 봐서 너무 놀랐다, 난 아직까지도 안 믿긴다 할머니댁 가면 용돈 주실 것 같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촌동생을 난 열심히 달랬다. 입관예배 시간이 다가올수록 난 마음을 경건히 먹었다. 할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봰 게 좀 됐어서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마지막으로 봴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목사님이 오셔서 입관예배를 드리러 지하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아빠가 내 앞을 막고 식장을 지키라고 하셨다. 그때 절망이란 감정이 들었다. 얼굴도 제대로 못 봬고 보내드려야 한다. 손 한번 잡아드리고 싶었는데, 아니 예배라도 기도라도 드리고 싶었는데. 살면서 가장 큰 아쉬움을 느꼈다. 하는 수 없이 프론트에서 사촌동생과 조용히 기도를 했다. 이때도 전혀 슬프지는 않았다. 입관예배가 끝나고 들어오는 가족들의 얼굴은 얼이 나가있었다. 난 그 모습이 충격이었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피폐해보일 수 있구나, 얼굴은 창백하고 눈가는 얼핏얼핏 붉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많이 부어있었고 못 다문 입에선 계속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때도 실감이 안 나서 남일같이 느껴지고 그저 안타까웠다. 내 일 같지가 않아서 슬프지 않았다. 그렇게 긴 하루가 다 갔다. 이모할머니 차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도 아무 감정이 안 들었다. 아빠 왼 팔에 그어진 두 줄과 내 머리에 달려있는 하얀 리본이 가슴에 자국처럼 남았다. 집에 와서 씻는데 갑자기 '사람은 잊혀질 때 목소리부터 잊혀진다' 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 생각에 쌓여있던 감정이 우르르 쏟아졌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이젠 들을 수 없다. 잊혀진다. 보고싶어도 볼 수 없다. 내가 살 날은 너무 오래 남았다. 내가 천국 갈 날이 갑자기 너무 멀고 험하게만 느껴진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너무 기억하고 싶었다. 근데 기억할 수 없다 잊히고 말 거다. 내 머릿속을 꺼내서라도 기억하고 싶었다. 가슴에 깊히 박고싶었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이 사실에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났다. 모든 불을 끄고 찬양을 틀고 열심히 기도했다. 목이 아파서 기도할 때 소리를 크게 안 내는데, 정말 소리를 지를 수 밖에 없었다. 너무 괴로워서 내 머리를 쥐어뜯고 때리며 기도할 정도였다. 내 기도소리가 하나님께 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목소리는 점점 더 올라갔다. 평소에 주변사람이 돌아가시면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찬양인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란 찬양을 열심히 불렀다. 두 곡 다 굉장히 밝은 멜로디의 찬양인데, 가사를 생각하며 부르다 보니 계속 눈물이 났다. 슬픔과 후회가 아닌 감사와 안심의 눈물이었다. 모든 친척들이 다 주님을 믿게 하시고, 서로 기도하며 주님을 의지할 수 있게 하시고, 향 자리에 향 대신 할아버지가 생전 쓰시던 성경책이 펼쳐져 있게 하심, 그리고 성경책 맨 앞 장에 끼워져있는 나와 내 동생의 사진,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심. 이 모든 게 너무너무 감사해서 20분동안은 감사하단 말 밖에 못 했다. 감사가 너무 커서 가슴을 마구 치며 감사하다는 말만 했다. 그렇게 새벽내내 기도하다 눈물로 잠들었다. 장례 마지막 날 내가 가족 중 손이 가장 커서,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모시게 되었다. 생각보다 무겁고 액자가 불안정해서 굉장히 긴장됐고 팔이 무척 아팠다. 화장터로 가기 전 할아버지의 관 앞에서 잠시 예배를 드리는데, 장례식장 앞 울려퍼지는 찬송가 소리가 추적추적 내리는 빗 소리와 섞여 그렇게 슬플 수 없었다. 애써 눈물을 참으며 리무진 조수석에 앉았다. 영정을 모시는 사람은 고개를 돌려서도, 손을 움직여서도, 수평을 흐트려서도, 심지어 울어서도 안된다고 했다. 수많은 부담감에 가는 차 안에서도 바싹 긴장이 되었지만 야속하게도 잠은 계속 쏟아졌다. 혹여나 액자를 놓칠까봐 수십번 깨서 액자 고쳐잡기를 반복하다 보니 화장터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굉장히 넓고 깔끔했다. 목사님의 뒤를 따라 영정을 모시고 화장터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같은 칸이 여러개가 보이는데 정말 사람 울음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리들이 울린다. 한 곳에서는 지도사를 붙잡고 제발 안 보면 안되겠냐고 비는 상주도 보였다. 불안한 마음을 이끌고 우리는 그 중 21번으로 들어갔다. 공간은 딱 엘리베이터 한 칸 만큼으로 협소해서 친척분들이 들어오시긴 턱없이 부족했다. 벽 한 편은 큰 유리로 되어있고 커튼이 쳐져있었다. 금방 커튼이 걷히고 화로가 보이며 어떤 기계에 실려 화로로 들어가는 할아버지의 관이 보였다. 생각보다 너무 순식간이어서 정말 엄청나게 허무했다. 우리의 그 작은 칸도 할머니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나도 눈물이 흘렀는데, 닦을 수가 없었다. 그저 손에 들린 할아버지의 사진을 꽉 쥘 뿐이었다. 유족 대기실에서도 계속 눈물이 흘렀다. 세상이 너무 냉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촌동생, 아빠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카페에서 동생, 엄마와 테무 구경을 했다. 어차피 이따 울거니까 테무에서 귀여운 것들이나 보며 슬픔을 잠시 잊었다. 화장이 끝나고 다시 그 칸으로 내려갔다. 커튼이 또 다시 쳐져있었는데, 그때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들었다. 10분 후 이 커튼이 걷히면 바스라진 할아버지의 유골이 있다. 처음 겪어보는 감정과 긴장감이어서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핑 돌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다시 커튼이 걷혔다. 직원이 할아버지의 유골을 빗자루로 쓸어담고 있었다. 난 저게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아서 그냥 청소하신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난 그렇게 모든게 유족 눈 앞에서 이루어질 줄 몰랐다. 눈앞에서 유골을 담고, 금속을 골라내고, 분골을 하고, 봉안함에 담는 것 까지, 모두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진행됐다. 그동안 그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숨소리와 통곡만 난무했다. 아빠가 봉안한을 품 안에 안고 납골당으로 향했다. 기독교 납골당이어서 교회와 비슷한 형식으로 지어져있고, 흘러나오는 찬송가 소리가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할아버지를 모실 장지를 정하는 동안 엄마와 이곳저곳 구경을 했다. 생전 고인이 좋아하던 것들을 장 안 가득 꾸며놓은 모습이 참 애틋하고 슬펐다. 난 무엇을 가져다놓을지 한참 고민하고 있었는데 지도인이 날 불렀다. 영정을 모시고 할아버지를 모실 장으로 갔다. 멀끔히 생긴 지도인이 정성스레 봉안함을 모시고, 나를 먼저 앞에 세우며 할아버지께 인사드리라고 했다. 무슨 말을 할 지 수없이 고민했지만 결국 그 말들이 머릿속에서 엉켜 눈물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나왔다. 윗층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또 눈물이 흘렀다. 참 가슴이 먹먹했다. 하지만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그 슬픔을 덮을 만큼 은혜로웠다.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 요한계시록 14:13 할아버지의 소천이 일차원적인 죽음의 슬픔이 아닌, 평안으로 주님 품에 안기게 하시고 또한 할아버지의 소망과 복을 우리를 통해 이루게 하시고 거두실 하나님께 더욱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주님이 말씀하시고 성령님이 보증하시는데 그 무엇이 모순될까 란 생각이 들며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그리고 만약 할아버지께서 한마디 하실 수 있다면, "난 이렇게 평안을 찾았는데 너희는 고생할 날이 많아서 어떡하니, 그 날들 잘 이겨내고 나와 같이 평안을 누리자" 라고 말씀하실거라고 하신 목사님의 말씀이 가장 와닿았다. 설교 내내 가슴 깊은 곳에서 자꾸 아멘이 나왔다. 목사님께서 아빠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부탁했는데, 아빠가 자꾸 목이 메어 인사로 대신한다고 하고 고개를 숙임으로 예배를 마쳤다.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흰 천으로 싸서 품 안에 안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가족과 지도인이 옆 자리에 내려놓아도 된다고 했지만 난 품 안에 안고 있겠다고 했다. 끝까지 함께해준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저녁을 먹으러 향했다. 난 그때까지도 사진을 품 안에 꼭 안고 있었다. 딱딱한 사각 액***만 그게 그렇게 포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 말씀 아멘 할아버지께서 생전 가장 좋아하신 말씀이다. 설날 추석같은 명절때면 늘 저 말씀을 가족이 합독했고 할아버지의 방에도 저 말씀이 크게 걸려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영정사진 앞에 펼쳐져 형광펜이 칠해져있던 말씀도 역시 저 말씀이었다. 몇 주 전 부터 교회 담임선생님이 저 말씀을 강조하시기도 했고, 이번주 교회 성가대 찬양도 저 말씀을 가사로 하는 찬양이었고 설교 말씀 또한 저 구절이었어서 거의 외우다시피 했던 말씀인데, 이렇게 연결이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참 하나님 살아계심을 이렇게 다시 한 번 깊이 느낀다. 할아버지의 생전 하셨던 고생들이 열매로 결실을 맺고 하늘의 큰 상급으로 보답받으시길 간절히 원한다. 주님 품에 어린 양 같이 평안히 안겨계실 할아버지를 마음속 영원히 기억하며 삶 속에서도 주님의 자녀임이, 할아버지의 소망을 이루는 통로임이 드러나는 경건한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사람들이 무서워, 다 날 쳐다보고있는것만 같아
과거를 그리워하되, 그곳에서 살아가진 마라. 과거를 후회하되, 그곳에서 갇혀있진 마라.
걍 즐기자! 살기 싫다는 생각도 살아있어서 할 수 있는 생각이니까.
아.. 해야지 진짜 맘 편히 쉬고 싶다 ㅠ 아아아아아아악.. 한 일주일만 휴가 내고 싶다 ㅠ 놀러 다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