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미친 걸까요.
저희 가족은 겉보기에는 정말 평화롭고 화목한 가정입니다.
서로에게 관심이 많고, 집안일이나 요리도 서로 해주려고 하고, 선물도 사 주고, 원하는 것을 응원도 해주고...
그런 줄만 알았는데, 애써 외면했던 것들이 이제는 계속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아빠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 싸이코패스 취급, 독립하겠다고 하면 아기 취급, 제 월급을 제가 모으겠다고 하면 배신자 취급...
여기에 제가 맞은 적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앉아 있다가 갑자기 걷어차였을 때, 방어하지 않고 다만 제 의견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은 폭력에 꺾이지 않을 것이다' 하고요.
직장에 다니며 가계에 보탬하고 있는 동생이, 퇴근 후 엄마의 사업을 도우라는 말을 듣고 짜증을 냈다는 이유로 어깨를 벽에 박히고 있을 때, 아빠와 동생 사이를 막아서며 '나는 몰라도 동생만큼은 지켜야 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들이 너무 낯설어요. 저는 정말 맞은 기억이 없는데, 왜 아빠의 폭력들에 그렇게 익숙한지.
저는 학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공립 고등학교에서 자퇴했습니다. 검정고시를 본 후로 미성년자일 때 취업해서, 한 달에 데이트 한 번 할 정도의 용돈만 남기고 이외의 월급은 모두 가사에 보태고 있습니다.
동생은 가계에 부담이 될까봐 꿈과 대학을 포기하고, 고3 대안교육 과정을 마친 뒤 취업했습니다. 동생도 가계에 돈을 보탭니다.
그 동안 학비지원, 주거지원, 차상위계층 등의 국가 지원은 신청한 적이 없습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유로요.
아빠는 주식을 하다 크게 망한 이후, 고혈압 때문에 바깥 일을 할 수 없다는 핑계로 지금도 계속 주식을 하고 있습니다.
엄마는 남 밑에서 일할 수 없다며, 월 28일, 일 12시간씩 자영업을 하며 200만 원 정도의 돈을 법니다.
초기 병을 발견하면 치료비가 든다며 부모님 모두 건강검진을 10년 넘게 받지 않았습니다. 또한 보험사는 모두 사기꾼이라며 어떤 보험도 들지 않고, 친척이 돈을 내며 제 앞으로 보험을 들어줘도 친척을 팔았다며 화를 냈습니다.
이렇게 저, 동생, 엄마 셋이 번 돈은 모두 생활비나 아빠의 주식 자금으로 들어가고, 엄마는 멀쩡한 집을 두고 이사를 가고 싶다며 이사 비용을 모으고 있습니다.
여기에 저나 동생의 독립, 결혼 등을 위한 저축은 월에 단돈 1만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가계부를 보여달라 말하면 부모를 못 믿는다며 그건 살인보다 더한 죄라고 설교합니다.
제게도 뒤늦은 꿈이 생겼고, 그걸 위해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때, '당연히 딸이 대학에 가면 좋다, 하지만 대학 다니면서 돈을 벌면 네가 피곤할까 걱정된다'며, 당연히 제가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원해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며 무척 가볍게 이야기하고, 이에 상처받았다고 말했을 땐 '세상에 원해서 애를 낳는 부모가 어디 있냐'며 제가 이상한 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살인 방화 강도보다 큰 죄이지만, 바깥에서는 부모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절대 말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작년에 크게 앓았던 병의 예방 접종을 맞겠다고 했을 땐, 부모도 안 맞는데 젊은 네가 왜 맞냐며, 네가 뭐 대단한 년이라도 되는 줄 아냐고 이야기했습니다.
정신과에 가보겠다고 이야기했을 땐, 이유도 묻지 않고 어떻게 부모에게 그런 말을 하냐며 윽박지르고 때렸습니다.
제가 학교나 온라인 상에서 따돌림을 당한 것을 이야기하면, '가족들한테 따돌림 당하는 아빠에 비하면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다', '별 것도 아닌 걸로 운다'며 제 고통을 축소합니다.
친구를 만날 돈이 없어서 직장에 휴무 며칠을 반납하고 일당을 챙겨 받을 땐, 자존심이 없다며 돈만 주면 몸이라도 팔 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빠의 의견과 다른 제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의 이야기를 하면, 너 같은 ***랑 대화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니까, 그런 연놈들 말고 정상적인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가족 상담을 받아보자, 가족 회의를 열어보자 등등을 제의했을 땐 경멸만 당했습니다.
엄마는 극단적인 차별주의자이고, 주변 사람들(특히 가족)이 자신을 돕는 게 당연하고 심지어 그것이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며, 남이 자신보다 잘되는 게 속상하다며 울기까지 하고, 온갖 범죄는 모두 피해자가 잘못한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와 의견 차이로 싸우면 아빠는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저와 동생이 잘못했다고 합니다.
직장 외에 집 밖에 나갈 땐 만나는 모든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려야 하고, 어떤 교통수단에 있는지, 어떤 건물에 있는지를 장소가 바뀔 때마다 이야기해야 합니다. 한 곳에 오래 머물거나 계속 이동 중일 때에도 수시로 위치를 보고해야 합니다.
제가 보내준 위치를 부모님은 인터넷에 검색해보고, 귀가 후에 그곳의 디자인이나 제가 먹은 메뉴 등을 물으며 검증 과정을 거칩니다.
제가 우울해하고 있으면 제 기분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년이라고 말하고, 혼자 있고 싶어서 문을 닫으면 시위하지 말라며 화를 냅니다.
초등학생 시절 동생과 자존심 싸움을 한 일화를 15년 간 반복해서 이야기하면서, 이를 근거로 너는 공감할 줄 모르는 싸이코패스이며, 외워서 타인을 배려할 수 있도록 교육해준 부모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친척들은 예전부터 제게 빨리 집을 나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드디어 그게 옳다는 걸 깨달아 지금은 제가 살 집을 계약했고, 가구를 들이고, 티 나지 않게 몰래 제 짐을 옮겨 두고 있습니다.
제 가정사를 아는 직장 상사분들은 제 이삿짐을 직장에다 숨겨둘 수 있게 배려해 주시고, 매번 필요한 도움을 나서서 찾아주십니다.
제 친구들은 제가 아무리 우울한 이야기를 해도 지지하고 응원하고 위로해줍니다.
부모가 저를 추적할 수 있는 온갖 방법들의 대응법도 오랜 시간 알아보고 준비하여 모든 계획이 완벽하고, 짐과 직장이 정리되는 대로 편지와 전화를 남기고 가족을 완전히 떠날 생각입니다. 적어도 제가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하기 전까지는 연을 끊고 숨어 있을 예정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본인들이 정말로 저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어리석은 가족들은 큰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고, 글로 써 보기도 하고, 아무리 봐도 제가 피해를 당한 게 맞고 제가 도망치는 게 맞는데도,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걸 그만둘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반드시 상처를 줄 행동을 할 것이고,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게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연을 끊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집의 가스레인지 팬에 불을 붙여 가족도 저 자신도 모두 죽여버리고 싶고, 튼튼한 천장만 봐도 목을 매달고 싶고, 칼을 보면 손목을 긋는 것과 이렇게 계속 살아가는 것 중 무엇이 더 고통스러울지를 저울대에 올려 비교하게 됩니다.
제가 정말 죽고 싶은 게 아니란 거, 사실은 살고 싶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을 나가고 바로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게 맞겠지요. 그렇게 해야 제가 살겠죠.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가 좀 복잡해서, 1달 보름은 지난 후에 나가야 사람답게 살 만한 조건이 갖춰집니다.
그 동안 멀쩡하게 버틸 자신이 없어요. 벌써 한 달째 울기만 하거나, 울지 못할 땐 이유도 없이 칼로 쑤시는 듯한 흉통을 느끼는 중입니다.
가장 가까운 정신과는 부모 몰래는 재진까지 다닐 수 없는 먼 거리에 있습니다. 초진 한 번만으로 모든 고통이 해결될 것 같지도 않고요. 심지어 제가 어떻게 해서든 방문 가능한 시간대를 잡으면, 그 시간대에는 모두 예약이 차 있었습니다.
이쯤 되니 부모의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가 미친 건 아닐까, 최근엔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저 혼자만의 망상을 사실로 믿어버리고, 아무런 잘못도 없는 부모를 직장이나 친구들에게 안좋게 이야기하며, 뻔뻔스럽게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와 연까지 끊어버리는 미친 년이 아닐까 의심됩니다.
모든 게 정상이고 저 혼자만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제 주변인들 모두가 제 망상과 거짓말에 속고 있는 피해자 같아요.
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연락을 하지 않거나, 제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하려 하면, 제가 그들에게 '그렇지 않으니 얼마든 기대라'라는 답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점점 죄책감이 커집니다.
저 자신이 주변의 착하고 동정심 많은 사람들의 감정과 에너지를 모두 빨아먹는 괴물처럼 느껴집니다.
어떻게 버텨야 좋을까요.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