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옵니다. 생각이 많은 아침이에요. - 십여 - 익명 심리상담 커뮤니티 | 마인드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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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콩_레벨_아이콘나의새벽
·한 달 전
비가 옵니다. 생각이 많은 아침이에요. - 십여 년 전 청각장애를 가진 중학생을 가르친 적이 있어요. 인공와우 수술을 해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언뜻 보면 장애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친구들과 해맑게 어울리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친구였어요. 가고 싶어 하는 고등학교가 좀 콧대 높은 곳이라, 장애가 있는 학생이 지원하는 걸 원하지 않았는데 내신 점수를 듣고는 꼭 와줬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성적도 좋았습니다. 어느 날 학생의 작은 소원 같은 걸 들었어요.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뛰놀아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려면 물기에 취약한 와우 장치를 빼야 하는데, 그걸 빼면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게 되니 어머니가 위험해서 안 된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나중에 같이 비 맞고 놀아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안전하게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웃는 모습이 참 예쁜 아이였는데, 이제는 어엿한 어른이 되어 있겠네요.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 저도 어릴 때 비 맞는 걸 좋아했습니다. 가끔 하굣길에, 가방 속 책을 비닐봉지로 싸매고 비를 맞으며 걷곤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모습이 얼마나 이상해 보였을까 싶지만, 어린 나이에 나름의 힐링을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때 처음 휴대폰이 생겼는데 그때 휴대폰들은 딱히 방수가 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빗물이 들어가 망가진 적도 두어 번 있었어요. 가끔은 아무런 짐도 없이 나가 비를 맞았어요. 그게 당시의 제게는 참 조용하고 편안한 시간이었습니다. - 어른이 되니 비를 맞을 일이 잘 없어졌어요. 우산이 없으면 싸구려 비닐우산이라도 사서 쓰고 다녔어요. 그러다 너무나 힘든 날은 우산을 살 의지조차 생기지 않아서, 그냥 걸었습니다. 때로는 조용히 울며 걸었고, 때로는 폭우가 쏟아지는데 우산 살 곳조차 근처에 없어서 더 서러워진 마음을 안고 소리 내어 울며 걸었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될 수록 비 오는 날이 우울해졌어요. - 그러다 한 번은, 혼자 있는 시간이 긴 저를 걱정해서 찾아와주신 분이 계셨는데 밖에서 이야기하던 중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어요. 둘 다 우산이 없어 이제 그만 헤어져야겠구나 생각했지만,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알아주시듯이, 이제 그만 들어가라고 하시는 대신 비를 피할 수 있는 작은 틈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가셨어요. 너무 조그만 자리라 자꾸만 밖으로 삐져나가는 저를 몇 번이고 안쪽으로 끌어당겨 주시며, 등으로 비를 다 맞으시면서도 제가 하던 말을 끝까지 들어주시고 가셨던 그날의 기억은 참 소중하게 남아 있어요. 비가 오면 그 생각도 함께 떠올라요. - 엊그제는 꽃을 보러 가려다 말았고, 어제는 어느 순간 꽃들이 다 피어 있어 이제 보러 가도 되겠다 생각했는데 오늘 이렇게 비가 오니 꽃이 다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듭니다. 실행은 못했지만 꽃놀이 갈 계획도 생기고, 꽃 떨어지면 어쩌지 걱정도 하고,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어서이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그래도 괜찮은’ 하루를 찾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오늘 하루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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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리기스
· 한 달 전
깊고 좋은 사연글에 감동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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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새벽 (글쓴이)
· 한 달 전
@카프리기스 비 오는 모습 보며 생각나는 대로 썼던 글인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