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싶은데 상담선생님이나 엄마께 상담하면 내가 죽 - 익명 심리상담 커뮤니티 | 마인드카페[상담|스트레스|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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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죽고싶은데 상담선생님이나 엄마께 상담하면 내가 죽은 후를 생각해보라는 말이 꼭 나온다. 내가 죽으면 슬퍼할 사람이 많다고. 그래서 생각해봤더니 눈물이 나왔다. 너무 유리멘탈이라서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새어나왔다. 그래서 죽고싶을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소리없이 울고 털어내기로 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까 적응이 되어버린건지 그럼에도 죽고싶어졌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고있다. 나는 엄마께서 슬퍼하실거 알면서도 죽고싶어하는 불효녀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죽고싶은 이유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살고싶은 이유는 많지 않다. 하지만 그 이유가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기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버텨왔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죽고싶은 이유가 늘어간다. 살고싶은 이유는 더 이상 늘어나지도 않는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성격때문인지 사람 만나는 일은 최대한 회피하고, 그러다보니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전혀 모른다. 중3인데 주변 고등학교 탐색도 안하고있다. 고등학교 진학을 거의 포기했다. 성적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점수라 생각하지만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싫은 이유는 사람때문이다. 집에만 틀어박혀서 혼자 공부하면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학교에 가면 사람을 만날수밖에 없다. 입에서 욕이 한 번이라도 튀어나온다면 나는 그 사람을 기피한다. 그리고 욕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나는 그 누구도 욕한적이 없다. 뒷담도 깐 적 없다. 그럼에도 학교에서 욕을 듣고, 집에서 욕을 듣고, 당장 밖에 나가면 욕을 안하는 사람이 없다. 나를 대상으로 욕하는건 죽고싶은 이유가 된다. 하지만 내가 대상이 아니더라도 듣다보면 두려워지는게 욕이다. 욕 한마디 안하며, 누군가를 까지도 않고, 운다고 해도 소리내며 우는법을 잊어버렸고, 무언가 때리지도 못한다. 아무도 없는곳에서도 소리지를줄 모르고, 노는 재미를 모른다. 스트레스를 풀어낼 방법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계속 쌓여간다. 자해를 할 자신도 없고, 그럴 기력도 없어서 그냥 엎드려서 베게를 안고 눈물만 흘린다. 그림을 그리면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지만, 올해 들어서부터 어째선지 손이 떨리며 선이 원하는대로 그어지지 않아서 최근에는 그리는 행위조차 그만두었다. 책을 읽으며 풀어나가기도 하지만 집에 있는 책은 전부 읽어서 흥미를 잃은지 오래다. 새로운 책을 찾아 읽다보면 그 책에만 집중하게된다. 문제는 내가 읽는 책은 십중팔구 암울한 책이다. 아포칼립스, 전쟁,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비애, 고통, 자살기도.. 대기업의 세계지배, 로봇등의 반란, 핵전쟁의 폐해.. 이런 책을 읽다보면 주인공에게 몰입하며 책이 끝난 후에는 이미 정신이 멍해져있다. 대부분 주인공이 죽으며 끝난다. 사건은 해결되지 않는다. 주변인들의 가슴이 먹먹해지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고 주인공은 한낯 벌레에 불과했다는것을 너무나도 절묘하게 표현해낸다. 나는 그런 주인공의 발톱때만큼도 못한 자신감과 의지를 지니고있다. 자존감은 이미 바닥을 찍은지 오래지만, 바닥 밑에 지하가 있다는걸 항상 의식하고있다. 그리고 그 자존감은 손쓸새도 없이 지하 밑으로 곤두박질친다. 살고싶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한지도 몇 년 되었다. 이상하게도 죽고싶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데 살고싶다는 생각은 인위적인 느낌이 든다.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 죽고싶어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이유가 별거 아닌 사람도 많고 아주 큰 사건에 휘말리는등 심각한 사람도 많다. 자살기도는 자주 했지만 칼을 몸에 대지 못하겠다. 칼은 아플 것 같다. 그리고 몸에 칼을 대면 절대 이 순간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 행복하고싶지 않다. 하지만 불행하고싶은것도 아니다. 그냥 바람같이 훅 지나가버리고싶다. 누군가는 태풍처럼 남에게 큰 영향을 주고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럴정도로 강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산들바람같이 슥 하고 지나가서 풀잎이 살짝 떠는정도의 영향밖에 끼치지 못한다. 나비의 날갯짓같이 그저 아주 약한 바람을 일으킬 뿐이다. 하지만 가끔씩은 그 행동이 크게 번질때도 있다. 한번의 작디작은 실수가 커지고 커져 나를 몰아세운다. 사건의 원흉은 언젠가 드러나게된다. 그럴때마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된다. 그것은 나에게 총질을 하는것과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나를 보는것은 나를 죽이는 행위이다. 사람은 총에 맞으면 죽지 않는가? 방탄조끼를 입는다 한들 화살에 관통당하면 죽지 않는가? 그 죽음은 그들에게서 비롯되는것이 맞다고 본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다고 여기는 행동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총질로 다가온다. 그들에게 죄를 따질수는 없다. 단지 자신을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뿐이라는것을 인지 못한 어린 사람들일 뿐이다. 틀린것이 아닌 다른것이다. 이를 몇번이고 들어왔음에도 지금에서야 인지하고 살아간다. 1년 전까지만해도 나는 그들의 행동을 혐오해왔고, 속앓이를 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인식덕에 조금이나마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있다. 문제는 나는 그들을 이해할 능력이 되지 않기때문에 그들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나에게 고통으로서 다가온다. 이해의 과실은 죄악인가? 아니,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문제는 이해하고 있음에도 고통을 준다던가, 누구에게나 고통으로 다가오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분명히 나에게 고통을 줄 의도를 가지고있다. 나는 그것을 풀어낼 힘이 없었기에 죽음을 원하고있다. 그들에게서 도망치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뿐이다. 내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나는 그저 학생일 뿐이다. 어른들은 어린아이의 입장을 생각하려하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어른을 따라하듯, 그저 그렇게만 생각한다. 어른들의 고통은 어린아이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른또한 어린아이의 고통을 이해하기 어렵다. 어른이 어린아이를 따라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어른을 따라하고싶을 수는 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자아로는 어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어른들은 어린아이를 이해할 능력이 있다. 다만 그들은 현재 어린아이로 살*** 않는다. 그렇기에 자신의 경험만을 바탕으로 생각하게된다. 결국 어른도 어린아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어른이 철학을 녹여낸 말을 한다면 멋있어 보일테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그런 말을 하면 어디에서 주워들은걸까 싶다. 영상매체에서 공부를 열심히 한 아이들이 나온다면 그런 아이들은 대단해 보일테다. 그들의 삶이 영상 속에 표현되어있어서 그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들을 어느정도 알게된 상태에서 어른스러운 말을 하는 그들을 본다면 대단해보일테다. '어린 나이에 벌써 저런말을 한다고?' '대단하다. 난 저 나이때 뭐했지?' 이런 생각들을 하게될테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은 주변에도 충분히 많다. 아무리 어려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어른보다도 어른스러운 아이들도 충분히 많다는 말이다. 그런 아이들이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다면 기분 나쁠테다. 이해를 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곧 고통으로 다가오곤 한다. 나를 이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통스러워진다. 다만 그 사람들과 안면을 트지 않았다면 고통스러울 일도 없을테다. 나는 아예 고통을 받고싶지 않아서 그 누구와도 안면을 트려 하지 않는다. 이는 고독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자 있는것은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는 고독조차 즐긴다. 차라리 학교에 있는 모두가 나를 투명인간 취급해줬으면 좋겠다. 아무도 나를 신경쓰려하지 않는다면 분명 행복할테다. 뒤에서 욕이 오고가는건 상관 없다. 나를 툭툭 치고가는것도 상관 없다. 나는 그저 그들이 나를 없는사람 취급할때 행복을 느낀다. 그게 나의 삶의 이유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남들이 나를 인지하는것은 죽고싶은 이유중 하나이다. 나를 인지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나는 자살에 가까워질테다. 나는 죽음을 재촉하려한다. 그럴 용기도, 기력도, 능력도 없는것이 자살을 원한다. 그저 한마리의 하루살이에 불과한 사람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꼴에 고통을 느끼고, 죽음에 두려움을 느낀다. 스트레스에 큰 영향을 받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어차피 높-으신 분들이 보기에는 태워죽이고 밟아 죽여도 모를 개미일 뿐이지만 우리는 감정을 느낀다. 아주 세세한 감정까지도 느낀다. 개중에는 감정의 변화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개미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나라는 사실도 죽고싶은 이유로 다가온다. 감정적인 행동은 최대한 절제하려 노력중이다. 하지만 감정에 너무 예민하기에 나는 결국 감정에 굴복해버렸다. 아주 약간 행복해지면 행복하다 느끼고, 아주 약간 불행해지면 죽고싶다 생각한다. 이것을 고치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힘들면 죽어버리면 된다는 생각뿐이다. 하루살이들은 짧은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며칠 안되는 짧은 삶을 최대한 이용해서 번식하고 또 번식한다. 다만 벌레라서, 표현의 자유가 없어서, 징그러워서.. 그래서 인간들은 그들을 죽이고 또 죽인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들도 살기 위해 먹는것일 뿐이다. 그들은 생각의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아서 본능에 몸을 맡길 뿐이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단 한번이라도 생각하지 못한적이 있는가? 기억 속에 그런 기억이 남아있는가? 아기일적의 기억이 온전히 남아있는 사람이 존재하는가?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을 악의없이 죽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죄악이라 칭하지는 않지않는가? 그들은 그저 우리를 괴롭혔을 뿐이다. 그들 또한 악의는 없었다. 그저 무언가 먹을 뿐이었다. 악의 하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 죽어나간다. 벌레와 인간은 그런 필연적인 관계속에 살아간다. 우리는 높은 사람들에게 벌레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악의 없이 우리를 짓밟을 수 있다. 우리도 악의 없이 올라갈 뿐이다. 우리는 그저 돈을 좇을 뿐이다. 그러다가 실패하고 죽어나간다. 사회적으로 죽어나간다. 사회적인 고립은 곧 실제 죽음으로 이어진다. 인간과 벌레니까.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죽음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우리에게 계속 용기를 주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를 이해한다 해도 그 상황을 같은 관점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서 겪지 않았으니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할테다.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다. 자신조차도 선택 하나로 완전히 달라진다. 과거의 자신을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다른 이를 이해하는 것은 아무리 강한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힘들테다. 이런 생각을 항상 하고있어서인지 누군가 나를 위로할때 그것을 위선이라고 생각하게된다. 상담사라 할지라도 위선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결국 그들도 돈에 굴복한다. 돈이 없으면 자신부터 생각하게되기 마련이다. 돈을 벌기때문에 누군가에 공감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있다. 진짜 죽고싶더라도 죽음을 택할 수 없었다. 그 순간에 눈에 들어온건 동생들이었다. 아이들은 나보다도 여릴테다. 나는 나의 귀를 막는 대신에 아이들의 귀를 막아주었다. 나의 눈을 가리는 대신에 아이들의 눈을 가려주었다. 그것때문인지 나에게는 가정내 폭력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이들은 폭력의 가해자인 아빠와 피해자인 엄마를 동등하게 대한다. 심지어는 부모님들끼리도 이미 지난 일일 뿐이라는둥 잘 지내신다. 나만 그 기억에 목을 매고있는건가 했는데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께서도 사실 아빠를 두려워하고있었다. 아이들은 순수하게 좋아하는걸테다. 하지만 나는 그 기억의 늪에 빠져서 빠져나올 방법조차 찾지 못하고있다. 도와달라는 말은 이미 많이 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잡아준것은 오로지 도구를 통해서였다. 같이 늪에 들어온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꼭 껴안으며 위로 헤엄쳐갔다. 위로. 하지만 늪에서 빠져나오기란 쉬운것이 아니어서 아직도 우리는 그 늪에 빠져있다. 위로 가는듯 했지만 사실 아래로 잡아당겨지고있었다. 숨은 막히고 괴롭지만 빠져나갈 방도가 없다. 자해를 한다는것은 결국 나를 그 늪에 가라앉게 하는 행위라는것을 잘 알고있다. 자살은 그 늪에서 벗어날 방법중 하나일테지만 나의 시체는 그곳에 남아서 절대 빠져나오지 못한다. 영혼은 자유가 될테지만 그것이 진짜 빠져나온것이 맞는걸까? 서로 껴안고있던 상황에서 나의 팔에 힘이 빠져버리면 결국 엄마는 깊은 늪 안쪽까지 빠져들것이다. 나는 이미 그럴거라는걸 알고있지만 죽어버리고싶은건 여전하다. 어서 빨리 이 질척하고 불쾌한 공간에서 빠져나가고싶다.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지만 결국 도움을 받아도 다시 가라앉고만다. 가해자는 우리를 밀쳤고 그 늪을 잊고야 만다. 우리는 그 늪에서 빠져나와도 그 늪에서의 끔찍한 기분을 잊지 못할것이다. 빠져나와도 어느샌가 다시 빠져있을테다. 우리는 당해야만 한다. 누군가 죽어야만 다른 이가 살 수 있다. 그게 우리인 이유는 약해서일테다. 약육강식의 개념은 이미 모두에게 적용되어서 서로를 잡아먹게 만든다. 나를 강하게 만드는것은 결국 돈일테고, 미성년자인 지금은 약할수밖에 없다. 인맥도 돈도 없는 사람은 결국 잡아먹힌다. 이는 그 누구라도 감히 거부할 수 없는 규칙이다. 힘이 강한 사람이 이 규칙을 따르기때문에 힘이 없는 사람은 당할뿐이다. 물론 약하면 거부하고싶은게 당연하지만, 약했던 사람이 힘을 얻으면 바로 강자의 편으로 돌아서버린다. 약자의 편인 강자가 없는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위선일 뿐이다. 죽고싶지만 엄마를 생각하면 죽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죽고싶어서 죄책감을 느낀다는 내용이었는데 왜 딴길로 새버린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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