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다. - 익명 심리상담 커뮤니티 | 마인드카페[상담|결핍|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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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콩_레벨_아이콘eternalsun
·8년 전
1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다. 경제적인 이유였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외가댁에 얹혀 살았다. 나는 종종 물었다. "나는 왜 엄마랑 안 살고 할머니댁에서 살아요?" "네가 애기 때 울고불고 할머니댁에서 살겠다고 졸랐으니까 그렇지."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가부장적인 외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울거나 말을 듣지 않거나 혹은 밖에서 놀다 늦게 들어왔다거나 하는 사소한 이유에도 매를 들고 나를 쫓아오셨고 그럴 때면 나는 외할머니가 계시는 방으로 숨어들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매일 할머니께 소리를 지르셨다. 너무 싫었다. 그 집에서 할아버지의 매 아래로 도망칠 수 있는 곳은 할머니 뿐이었는데. 너무 화가 나서 할아버지의 욕을 잔뜩 썼고 그 쪽지를 엄마에게 들켰다. 혼나지 않았다. 그저 엄마에게 그 쪽지의 내용이 그대로 적힌 메일을 받았을 뿐. 2 열두 살이 되어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 아빠는 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들들 볶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아빠는 밖으로 나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엄마는 늘 예민했다. 약 10년 만에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도 너무 싫었다. 집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예민한 엄마의 눈치를 보거나 눈치를 보거나 눈치를 보거나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엄마가 아빠와 언성을 높이거나 아빠가 술을 마신 날에는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엄마의 찢어지는 목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3 이 시기부터 중학교 때까지는 좋은 기억이 정말 거의 없다. 나가서 놀기 위해서는 몇 주 동안의 집안일을 끝마치고 엄마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또한 다른 친구들이 '엄마와 싸웠다'고 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됐다. 나는 싸운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어느 여름방학, 중국에 계시는 친적댁에 한 달 동안 머물게 되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을 준다는 것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그 한 달 동안은 정말 가족이 생긴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그 가족은 시한부 가족이었다. 한 달이 지나자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도 모르게 그 관심이 그리워 밥상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엄마에게 혼이 났다. "너는 중국에서 엄마 보고 싶다고 운 적이나 있니?" 있을 리가. 나는 중국에서의 그 한 달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약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과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내 마음 속 감정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4 중 3 여름, 고등학교 원서를 써야 했다. 엄마는 내가 그 지역에 유명한 사립고를 가길 바랐다. 그치만 상위권이던 내 성적은 중 2 사춘기를 거치면서 하락세를 보였다. 합격을 장담할 수는 있었지만 기숙사 입사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엄마의 닦달에 질린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 차라리 전문계에 가서 취업을 하겠다고. 엄마가 말했다. "너는 다른 애들이 너보다 성적 높고 그러면 안 창피하니?" "네." 안 창피했다. 그게 왜 창피할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창피해. 네가 공부 못해서 이상한 대학 다니고 그러면 엄마는 창피할 것 같아." 엄마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엄마는 다른 엄마들에 비해 공부에 별로 신경 안 쓰잖아. 공부하라고 닦달하지도 않고." 그리고 우리 집은 아빠의 직장 근처로 이사했다. 엄마의 눈치를 보느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빠의 술자리 횟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엄마는 약간의 안정을 찾았다. 5 결국 나는 그 사립고에 입학했다. 겨울방학 내내 다른 짓에 몰두하던 나는 기숙사 입사 시험을 망쳤다. 역시 기숙사는 떨어졌고 엄마에게 무척이나 혼이 났다. 그리고 나는 모의고사 점수를 올려 기숙사에 들어갔다.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엄마와 떨어져 있는 동안의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평일에는 학교에서 지냈고 주말에는 도시인 할머니댁 근처에 있는 영어학원에 다녔다. 그리고 일요일 밤에 되면 할머니댁에서 바로 기숙사로 향하는, 그런 1년을 보냈다. 때때로 집에 갈 때마다 느낀 점은 '내가 없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정말 완전한 가족의 모습이구나.'였다. 가족들은 내가 없는 동안에도 그들끼리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보러 다녔고 그들만의 추억을 공유했다. 6 한번은 친구 문제로 상담을 받았다. 내가 상담 선생님에게 한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미움받을 것 같아요.'였다. 다른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내가 먼저 다가가면 나를 싫어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상담 선생님은 말했다. "가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정서적으로." 속이 너무 시원했다. 더욱 얘기해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모의고사 점수를 올려야 한다. 엄마에게 보여 줄 것이 이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7 고 삼이 되었다. 정말 이렇게 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살았던 시간을 꼽으라면 이 시기를 꼽을 것이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답게 성적은 쑥쑥 올랐고 드디어 엄마에게 '보여 줄' 것이 생겼다. 그렇지만 두려웠다. 내 성적이 떨어지면 어떡하지? 그 불안함은 가끔 엄마와 통화할 때 나도 모르게 드러났다. 내 불안함에 엄마가 짜증을 냈다. "네가 대학 못 간다고 아무도 너한테 뭐라고 할 사람 없어. 왜 이렇게 불안해 하는 거야?" 그럴 리 없다. 나는 분명 기억한다. "엄마가 예전에 제가 대학 못 가면 창피할 거라고 했잖아요." 엄마가 당황했다. "아니 그건 그때 얘기지. 왜 이제 와서... 그리고 네가 고 일, 고 이 때 공부 안 한 건 맞잖아. 어떡할 거야 망치면 재수하든가 해야지." 너무 힘들었다. 내 여태까지의 노력이 전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인정받고 싶었는데. 그리고 그 해 여름, 가족들은 나를 한국에 두고 한 달 동안 여행을 떠났다. 서운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첫째인 내가 서운하고 힘든 티를 내면 안 되니까. 8 수능을 망쳤다. 정말 망쳤다. 집에서 가채점을 하면서 울었다. 엄마가 당황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왜 우냐고 물었다. 왜긴. 재수 이야기도 나왔다.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일을, 엄마의 그 음성을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노력에 대한 배상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원했던 대학에, 남들이 이야기하는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 엄마가 기뻐했다. 근데 나는 그렇게 기쁘진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그게 다였다. 9-1 대학생이 된 나는 서울에 고시원을 얻어 살고 있다. 어둡고 좁은 천장을 볼 때면 온갖 것들이 다 떠오른다. 대학에 합격했지만 고 삼 때보다 더욱 힘들고 외롭고 무기력하고 우울했다. 하고 싶은 것은 없다.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다른 친구들은 대외활동이니 동아리 활동이니 알바니 자신이 할 것을 찾아가고 있다. 나는 뭐지? 9-2 친구들은 모르지만 대학에 올라와 꽤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다. (친구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럴 용기도 들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양성***였으니까.) 그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도 헤어짐의 이유는 늘 똑같았다. 내 예민함과 불안함, 애정결핍에 질린 것이다. 그래도 나름 다들 돌려서 말해 줬다. 연애관이, 가치관이 맞지 않는 것 같다고. 그렇지만 너희도 다 알고 있지 않아? 문제는 우리가 안 맞는 것에 있다기보단 나한테 있다는 거. 10 오늘도 똑같은 이유로 헤어지고 오는 길이다. 이 사람을 만나기 전에 나는 다짐했다. '더 이상은 똑같은 이유로 헤어짐을 맞이할 여력이 없다. 사람 사귀지 말아야지.' 너는 날 감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 번만 더 믿어보기로 했다. 뭐, 결과는 별다르지 않았지만. 11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 모든 것들은 머리에서, 마음에서 떨어지지 않고 끈적거리며 붙어 있다. 조금 떨쳐냈다 싶으면 남아있던 잔여물들이 번식해 더욱 커졌다. 감당이 안 되네. 그래서 휴학을 결심했다. 엄마에겐 알바해서 여행을 다니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치료를 받고 싶었다.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했고 그 시간을 차라리 돈으로 지불했으면 싶었다. 나는 내 마음 속 이야기를 하는 것이 너무나도 낯설고 힘들고 민폐를 끼치는 것 같으니까 차라리 돈을 내는 것이 적당할 것 같았다. 와, 근데 상담 비용 진짜 비싸네? 12 내 존재에 대해서 엄마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면서 '죽을까?' 싶은 생각도 많이 했다. 이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물론 크지만 내 죽음에 엄마가 평생 눌려 살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에. 근데 지금은 조금 생각이 바뀐 것도 같다. 분명 내가 죽으면 주변에선 죄책감 가지지 말라고 위로할 테니까. 차라리 내 가족 정서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엄마에게 보이고 보상을 받고 싶었다. 13 이 이야기가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다. 내가 완전히 나아질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제발 이 끈적이는 진창을 전부 뜯어내 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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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콩_레벨_아이콘
already
· 8년 전
비용때문에 어렵다면 스스로 공부해보시면 어떨까요 저는 상담치료 받으러 다니긴 하지만 저역시 비용때문에 편입해서 상담공부를 하고 있어요 다행히 국가장학금 받고 하니 비용이 거의 안들어요 도서관에 있는 심리책을 보시거나 관련된 공부를 조금 해보시면 도움이 되실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