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의 정신적 고통으로 평생 전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제 첫 기억은 세 살입니다. 이후 다녔던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앞까지 혼자 장난감 말을 끌고 갔다가, 집을 찾*** 못 해서 그 말에 앉아 엄마 언제오나 기다리던 기억이 최초의 기억입니다.
이후, 엄마에게 들은 바로는 동네 주민분에게 납치 비슷하게 되어 있다가 한참 후에야 저를 데리고 있다고 알려 눈물콧물 다뺐다며, 금붙이 다 줬는데 아무래도 수상하다 하셨어요. 일부러 그런게 아니냐는.
당시.. 에너지가 넘쳤던 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 동네를 누비고 다녀서 매일같이 절 잃어버리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해요.
그 최초의 기억 속에서도, 전 엄마를 기다렸지만, 엄만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 슬펐고요. 왜.. 엄마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참 오래도록 곰곰 생각해봤지만.. 모르겠네요.
늘 꿈을 꿔도, 엄마는 저를 찾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짓고 슬퍼하는 꿈을 종종 꾸곤 했어요. 그게 사춘기 시절 내내 절 괴롭게 했어요.
제 유년시절은 유난히도 눈물로 가득합니다. 부부싸움 났다하면 늘 전 찬밥 신세였거든요. 아빤 기원에서 바둑 두느라 집은 뒷전이었고, 그런 아빠를 잡다잡다 악다구니써도 안 되니 저더러 아빠 딸이니 니가 아빠한테 가라 그러셨고, 유난히도 아빠를 쏙 빼닮은 절 늘 부부싸움으로 끌어들이곤 하셨어요. 아빤 절 방치하셨고요.
어느 날은 팬티바람으로 쫓겨나기도 했었고, 6살 땐가 구구단을 외우지 못 한다는 이유로 차디찬 겨울에 맨몸으로 쫓겨나기도 했었고요. 부부싸움 중 불똥이 저에게 튄 날, 이웃 집으로 살려달라며 도망친 일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의 이야기입니다. 좋은 기억들도, 나쁜 기억들도 부분부분 기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7세에 학교에 갔으니, 그 무렵의 기억이 굉장히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10살 무렵, 지금 사는 도시로 이사를 왔고, 부부싸움은 종종했고 그때마다 전 여전히 시달렸지만 남동생은 여전히 평온했습니다. 큰 아이라는 이유로 3,4살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은 모조리 동생차지였고 전 늘 결핍을 느꼈어요.
커서는 금전적인 부분은 지원을 다 받았어요. 그럴 여력도 있었고, 절 미워하진 않으시니까요.
근데.. 전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으며 키우니까..
어릴 적 제가 받은 수모가 견딜 수 없는 분노로 다가오더라고요. 엄마에게 악다구니 쓰기도 평생을 그러고 살았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내가 금전적으로 안 해준 게 무어냐시네요.
아이를 낳고보니 아이는 그저 절 온 영혼을 다해 사랑해주는 존재인데, 나도 그랬던 작디 작은 아이였을 뿐인데.
아이를 낳으면 부모를 이해할 수 있을꺼다?
***...
40 다 되어가는 지금도 원망만 가득합니다.
엄마가 사과한답시고 하면서 자기도 몰라서 그런걸 이제와서 어쩌냐고 해요.
그 말에 전 더 분노가 일어요.
어린 아이는 그럼 무슨 죄를 지었는데요.
지금이야 다 큰 어른이기에 이 결핍 또한 이제는 제가 채워야 한다지만.
평생 결핍을 느꼈기에.. 그 목마름을 어떻게 채워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 것 같고,
이 세상은 날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고,
이 세상에서 나만 없어지면 평화로울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평생하며,
무기력증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던 10대와 20대를 겪은 저는.. 조금씩 제 일을 찾아 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가끔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다 부질없게 느껴지고
다 때려치우고 없어질까,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들곤 해요...
음. 결혼은 제 결핍을 채워주는 사람과 했어요.
하지만 그 사람도 사람이기에 저로 인해 더는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엄마와의 일로 죽어버릴꺼라고 악다구니 썼던 날,
그 사람은 제게 자기도 제 편이고, 아이들도 제 편이라며 다독여주었어요.
하지만 그 이후, 자기도 힘들다고 해서 더는 티를 내지 않고 있지만 마음의 우울이.. 가시지는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