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부모님이 화목했던 게 다 가짜였다고 생각하면 어떨 것 같아요?
우리 집은 사정이 안좋아서 어릴 때부터 가족이랑 좀 오래 흩어져 지냈어요.
아빠는 가끔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엄마는 흩어진 이래로 거의 보질 못했고(엄마 실수로 형편이 안 좋아졌으니 친가가 엄마를 싫어했어요) 저는 주로 친할머니 아래에서 자랐어요.
근데 친할머니는 평소엔 괜찮았지만, 가끔 여행도 데려가주고 친절하긴 했지만 사소한 실수만 해도 폭력적이고 무서운 사람으로 변했어요.
오늘 죽겠다 싶을 정도로 맞고 집에서 쫓겨나면서 애미가 버린 년, 고아원에 가야 한다는 소리 듣고, 혼나지 않는 날이어도, 가령 티비로 엄마 찾아 삼만리 만화를 보고 있으면 너네도 집에서 당장 나가서 엄마 찾아가라는 소리를 농담으로 종종 할머니께 들었어요.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철없는 꼬마였던 제가 할머니 대신 엄마가 있었더라면, 우리 가족이 다시 완성되면 난 행복해질 수 있겠다는 착각에 빠졌던 것 같아요.
누구라도 도와줬으면 좋겠단 생각으로 할머니의 가해 내역을 일기장에 적었는데, 주변 어른들의 2차 가해와 가해자의 자살협박이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할머니가 나가고 우리 가족은 엄마랑 같이 지내게 됐어요.
할머니를 쫓아냈다는 찝찝함이 제게 아직 남아있었지만 어쨋든 바라던대로, 친구네 가족들처럼, 나도 이제 엄마랑 아빠가 둘 다 있으니까 당연히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는 할머니와 물리적 거리는 떨어졌지만 할머니가 남기고 간 흉터는 쉽게 지울 수가 없었고요, 저희랑 만나지 않고 7년간 혼자 지내온 엄마는 저희가 무얼 당하고 살아왔는지 공감하거나 자세히 알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도 죄책감과 홀로 살아온 엄마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좁히기 어려운 간극이 생겨버린 거죠.
그 땐 속상했지만(지금도 속상하긴 하지만) 지금은 엄마의 심정은 이해해요. 자식이 자기 때문에 얼마나 끔찍한 폭력들에 노출됐었는지 점점 알아가는 거 엄마도 분명 무섭고 힘들 거예요.
그리고 평소엔 괜찮았어요. 할머니 문제만 빼면 엄마랑 맞는 취미도 있었고 재미있게 얘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리고 다른 집안도 그런진 모르겠지만, 우리 집안은 우리 남매들의 학업문제로 부모님이 많이 다퉜어요. 부모끼리 다툴 수도 있겠죠. 그런데 보통의 집안이라면 저는 자식이 공부안하고 게으르면 부모가 자식을 탓하지 다른 부모 쪽을 탓하진 않을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저희는 이상할 정도로 자식이 잘못하면 아빠의 분노가 엄마한테로, 엄마의 분노가 우리에게로 전달되는 구조였어요.
아빠가 자식이 공부를 안해서 화가 났다면 당연히 혼나야 할 건 자식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아니라 엄마를 먼저 혼냈어요. 자식 관리 안하냐고.
항상 그 구조가 의아했어요.
그런데 최근 동생의 수능까지 끝나고 나니까 엄마가 마지못해 밝히시더라고요.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자식들을 대학 보내고 자기는 나가는 걸로 아빠랑 약속을 했었다고요.
그제서야 다 이해가 가기 시작한 거예요.
엄마는 항상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고,
그래서 우리와 싸울 때마다 아무렇지 않게 나가야 되겠냐는 말을 했고,
그래서 학업문제에서 아빠는 엄마를 쉽게 탓할 수 있었던 거고,
저는 그 동안 이런 약속도 모르고 원하던 가족이 완성됐다는 엄청난 착각을 하며 성인이 되도록 살아온 거예요. 고작 엄마가 집에 왔다는 거 하나만으로요.
이제 저는 성인이니까 슬슬 독립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가족은 잠깐 시선에 없는 경우도 있고, 저를 위해 살아가야 하겠죠. 알아요.
엄마의 삶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만 만들어온 제 탓도 있고요.
그런데 엄마의 속을 알고 나니 제가 생각했던 모든 게 다 가짜였다는 허탈함을 버릴 수가 없어요.
엄마랑 아빠랑 나름 농담도 하시고 서로 장난 치면서 사이 좋아보였는데 이게 진짜였는지 이젠 믿을 수가 없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더 노력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생기기도 하고, 엄마가 애정을 줄 기간이나 양은 처음부터 제한되어 있었으니 엄마는 언제든 우릴 포기할 준비가 되었던 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할머니 말이 맞았던 것 같아요. 엄마가 온 순간에도 전 엄마가 버린 년이 맞았는데 제가 혼자 살 수도 있었던 엄마를 붙잡아서 우리 집으로 끌어들였어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아빠의 원망을 또 들을 일 없었을 텐데, 피곤하게 자식을 키울 필요 없었을 텐데 제가 엄마의 시간을 망쳐버린 것 같아요. 제가 착각에 빠져서 엄마도 가족도 다 망쳐버린 것 같아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든 게 혼란스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