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에는 용기가 없고 그렇다고 살기는 싫습니다. - 익명 심리상담 커뮤니티 | 마인드카페[상담|중독|고민]
알림
심리케어센터
마인드카페 EAP
회사소개
black-line
죽기에는 용기가 없고 그렇다고 살기는 싫습니다.
비공개_커피콩_아이콘비공개
·3년 전
안녕하세요. 20대 후반의 남성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저의 성장과정부터 간단하게 기술하고자 합니다. 최대한 감정적이지 않게 순화하여 적어봅니다. 제가 어릴적에는 어머니가 출판사에 근무하셨기에 덕분에 어릴적부터 책을 장난감 가지고 놀듯이 놀았으며, 자연스럽게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접했습니다. 많은 Y세대가 그렇듯이 무조건 대학을 가야한다는 교육열과 세뇌교육으로 팍팍한 살림에도 미술학원, 피아노학원, 검도학원, 논술학원, 교과학원 등을 다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배부른 소리일수도 있겠지만 자식 잘되길 바라는 부모 마음에 그렇게 자라왔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얼마 되지도 않는 9급 공무원 월급으로 가정을 이끄셨습니다. 저의 초등학교, 중학교는 그저 그렇게 평범하게 지났습니다. 어쩔수없이 주민등록상으로는 형으로 되어있지만 원수와도 같은 2살 위의 놈과 아직까지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저를 괴롭히는 수많은 아픔들은 이 사람으로부터 기인합니다. 어머니의 태몽과도 같이 형은 황소, 저는 꽃같은 성격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먹고살고 가정을 지탱하기에 바쁘셨으며 자연스럽게 그 놈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걸핏하면 도를 넘는 폭력이 이어졌습니다. 소리 듣기 좋다면서 수시로 뒤통수를 세게 갈긴다던지, 밤 중에 집 근처 학교 뒷편에 끌려가서 코피 터지도록 맞거나, 1시간 넘게 머리 박고 엎드려뻗쳐 당하거나, 분노조절장애로 가위를 던져서 아직까지 제 왼쪽 팔에 남아있는 큰 흉터, 컴퓨터게임중독, 그렇다고 소극적인 반항이나 부모님에게 고자질하면 이후 부모님이 없는 시간에 더 심해지는 폭력. 자연스럽게 저는 위축되었고 그나마 활발하던 성격까지 극소심하게 바뀌었습니다. 몇 번은 그 놈이 자고 있는 시간에 식칼을 들고 방문 앞에서 서성거리기도 했습니다. 완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을겁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야간자율학습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 놈 얼굴 보기 싫기에 무조건 밤 11시까지 끝까지 하고 귀가했습니다. 당시 그 놈은 고 3이라서 진로 문제로 부모님과 큰 갈등을 겪고 있었기에 살얼음판같은 집 구석에 들어가기 싫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들어서면서부터 소설창작 동아리에 들어가서 그동안 쌓아온 독서를 바탕으로 소설도 아닌 감정배출용의 현학적이고 형이상학적,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괴상하고 뒤틀린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글만 써댔습니다. 교내 Wee클래스라는 상담센터에서 무료로 심리상담도 받았습니다. 거의 광적으로 글쓰기에 집착했습니다. 아무도 못 보게 좁쌀만한 글씨로 노트에 끄적이다보니 눈은 항상 피로했고 오른손 날은 항상 샤프심의 흑연으로 거뭇거뭇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참고 표출하지 못했던 감정을 글로나마 쓸 수 있다는데 병적인 자기만족을 느꼈습니다. 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는 내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다는 게 매력적이었습니다. 현실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렇게 공부도 안하고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교실 구석에서 음침하게 글만 써대다보니 곧 왕따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가정 분위기도 싫었고, 학교 가기도 싫었고, 그나마 일탈은 하지 않았던게 불행 중 다행이었는지 더욱 글쓰기에 집중하였습니다. 앞 뒤 문맥 맞지 않게 분노, 우울과 같은 부정적 감정의 응어리였습니다. 잠시 당시 가정으로 다시 주제를 돌려보고자 합니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지금과는 달리 감정적, 폭력적, 예민함의 끝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중재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 놈은 음악을 하고 싶어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어느날 그 놈이 분노조절을 못하고 가지고 있던 통기타로 어머니의 팔을 내리쳐서 깁스까지 만들거나, 밀쳐서 어머니 머리에서 피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이해못할 초월적 모성애로 그 놈을 돌보셨습니다. 자연스럽게 가정내에서 계급이 나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 그 놈 - 어머니 - 나. 대학은 국어국문학과로 들어갔습니다. 이후로 아버지가 그 놈더러 '하숙생'이라고 비하하는 것에 한 술 더 떠서 저는 개인적인 감정까지 섞어서 '벌레'보듯이 했습니다. 성인이 되었다는 해방감에 당시 영향을 받던 펑크, Emo패션을 따라하면서 귀와 입술, 눈썹 등에 수많은 피어싱을 박아대고 귓볼은 1cm지름까지 확장피어싱을 했습니다. 1년365일 검은색 옷과 밴드 티셔츠만 입고 학과실이나 화장실에서 불끄고 비명과도 같은 소리만 질러대다보니 당연히 주위에 친구는 없었습니다. 군대는 의경으로 갔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도심지에서 떨어진 육군으로 갔으면 그릇된 선택을 했지 않을까합니다. 의경으로 가서도 계속 외부진료를 위해 수시로 외출하며 심리상담과 항우울제(렉사프로정), 수면제(스틸녹스 CR정)을 복용했습니다. 혼자 지내온 히키코모리에게 단체생활은 적응하기 어려웠으며, 소등 시간이 지나고 몰래 화장실에 가서 어두운 가운데 수시로 면도칼로 자해를 했습니다. 그렇게 아직까지 제 왼쪽 손목에는 흉터와 그 때 새긴 I'm이라는 영어 글자가 남아있습니다. 전역 후 대학 2학년을 지나고 호주로 도피성 워킹홀리데이를 떠났습니다. 어쩌면 처음으로 용기를 냈던 나름의 일탈이었습니다. 현지의 공장에서 일하면서 한때 형이 하겠다고 했다가 크게 꺠지고 꿈을 접었던 음악에 대한 열정을 그곳에서 불태웠습니다. 이후 비자기간 만료에 따라 귀국해서 음악관련학과로 전과를 결정하고 부모님을 설득했습니다. 그전부터 몰래 해오던 보컬에 베이스 기타, 일렉기타, 미디 작곡작사, 레코딩, 믹싱과 마스터링, 최근에는 무대음향과 공연기획까지 손을 댔습니다. 어쨌든 성공적으로 전과해서 졸업까지 무사히 마무리지었지만, 졸업과 동시에 코로나가 터집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형이 신천지 신도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저는 더욱 더 그를 경멸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은 달라도 집에 같이 있는 시간은 싫었으며, 혹시라도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모른 척하거나 본능적으로 기분이 나빠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감정배출 및 자기만족용으로 행했던 글쓰기의 연장선은 음악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슬픔, 분노를 담은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지역 로컬밴드의 합주실 한 켠에 월세를 내고 개인 작업실에 틀어박혀 살기 시작했습니다. 완벽주의에 빠져서 정작 결과물은 없고 무의미하게 히키코모리짓만 하다가 시간을 많이 허비했습니다. 어릴적부터 남에게 피해주면 안된다는 어머니의 세뇌교육으로 인해 지금껏 남을 해하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제 자신을 죽여왔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심리상담이나 살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한다는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끼며 방치하면서 상처는 더 곪아갔습니다. 당연히 방 구석에만 박혀서 제 자신만의 세계에서만 살았기에 성격은 뒤틀리고 대인관계는 어색했습니다. 처음 한 두 번의 실패에 이어서 뭐가 문제인지 분석하고 다시 시도해도 또 실패하면서 자포자기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타인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더라도 이내 저의 고슴도치와 같은 끝없는 뒷걸음질과 자기방어에 지쳐서 떠나가버렸습니다. 그렇게 역시 혼자가 편하다고 자기를 위로하면서 부모라는 캥거루 주머니 안에서 나오길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20대 후반. 부모님의 정년퇴직과 사회적 활동 가능 시기가 끝이 다가옵니다. 홀로 서기를 해야함은 알지만, 이따금씩 보기 싫어도 들리고 보이는 청년실업문제, 사회적 이슈, 같은 Y세대의 각종 하소연글을 보면서 막막하기만 합니다. 나름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뭐라도 해보기 위해서 각종 공장 및 물류센터,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오면서 각종 악기와 음향기기들을 구매했습니다. 동시에 저의 부모님이 가정을 이끄셨던 노력이 대단했다는 게 한편으로는 어느정도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또 현실도피를 위해서 귀농, 해외이민 등에 대해서 알아봐도 현실적으로 어렵다는데 좌절합니다. 최근에는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이지만 늦게 음악을 시작한만큼 그렇다할 결과물도 없고 실력도 없음에 현실의 벽을 실감하고 취미로 밀어둘까 고민도 합니다. 그렇게 그저 많은 사람들처럼 '음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때 음악을 했던 사람'이 될까에 안타깝기도 합니다. 결국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단기적 쾌락만 쫓으며 흡연과 음주에만 빠져 살아갑니다. 심심하면 개인작업실 가서 멍하니 기타나 튕기고 있습니다. 장기적 쾌락을 위해 자격증, 스펙 쌓기, 취업준비를 해야함은 알지만 단기적 쾌락에 길들여진 뇌를 바꾸기가 힘듭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장기적 쾌락을 위해 무언가를 시작하더라도 이내 에너지가 고갈되어 번아웃에 빠지고 우울감에 빠지고 다시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합법 마약인 음악만 들으면서 방에서 의미없이 유투브, 커뮤니티만 들여다봅니다. 당장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들의 형편에 비하면 아쉬울 것 없이 배부르게 지내고 있음을 알지만, 그 안락함을 스스로 깨부술 힘이 없는 듯 합니다. 그저 뭐를 하더라도 안 되면 말지 식으로 비관적이게 됩니다. 솔직히 곧 있을 백신 접종을 앞두고 뉴스에서 보았던 부작용으로 사망한 사건이 저에게도 일어났으면 합니다. 결국 저는 죽을 때까지 현실도피만 하다가 생을 마감해야할지 바닥난 자존감에 얽히고 섥혀 복잡한 마음의 실타래를 어디서 어떻게 풀기 시작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적극적인 치료를 권장하시겠지만 모두가 남을 살리겠다는 성인군자와 같은 희생정신을 가지시진 않았을 것이며, 이러한 저의 우매한 판단이 틀리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필요합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최대한 내가 필요한 것만 얻고말겠다는 소시오패스적 성향에서 점차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어머니의 '남에게 피해주지 말라'는 세뇌교육이 어쩌면 지금껏 많은 사람을 살린 듯 합니다. 저만 고통스러운 되지, 남까지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우선적으로 제 마음속 아픈 아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게 중요함은 알지만, 경쟁에 익숙하게 자라온 저로써 남들은 모두 건강하든 감추든해서 어떻게든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데, 저는 이런 문제들을 처리하는데 급급하여 남들에 비해 뒤쳐진다는 열등감과 조급함에 혼란스럽습니다. 최대한 정리를 하고자 노력하였지만 다소 글에 두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몇 번은 첨삭을 거쳤지만 미처 놓친 부분은 부디 양해 바랍니다.
지금 앱으로 가입하면
첫 구매 20% 할인
선물상자 이미지
따옴표

당신이 적은 댓글 하나가
큰 힘이 될 수 있어요.
댓글을 한 번 남겨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