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첫 문장을 시작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카 - 익명 심리상담 커뮤니티 | 마인드카페[상담|우울증|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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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무엇으로 첫 문장을 시작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카테고리 고르는 것도 한참이었고요. 그저 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지내온 인생을 통해 내리는 고백인지라 글이 길어지는 점 죄송합니다. 긴 글 읽기 불편하신 분들은 가장 마지막 문단만 보셔도 좋아요😊 28살, 드디어 모든 것을 나에 대한 것을 용서하고 누군가를 용서하며 남에게 상처주었던 일들에 대한 사과, 그리고 나 스스로를 용서했습니다. 그래서 이 문신을 할 수 있었어요. 집은 유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유치원에 보낼 돈이 없는 나날이 많았습니다. 한두달 보내고 3개월은 집에서 보내는 식으로 지냈었고 그나마도 맞벌이셨기에 그 3개월은 온전히 할머니댁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을 수 없기에 잠시나마 엄마 본인이 아들과 딸을 앉혀놓고 가르칠 때마다 저는 매번 틀렸고 동생은 항상 모든 것에 백점이었습니다. 한살 터울의 동생이 있는데 내 동생은 정말 똑똑해서 만 3세가 되던 해, 뉴스에 있는 한자까지 또박또박 읽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덧셈뺄셈도 스스로 하고 신문에 앉아 하루종일 쳐다보던 동생은 어느새 부모님도 모르는 단어를 물어보아댔고 뜻은 몰라도 영단어를 어찌 읽는 지 알았습니다. 아빠와 같이 바둑티비를 몇번 보더니 룰을 익혀 둘 줄도 알았고 6살에는 할아버지와 장기도 두었습니다. 아빠도. 엄마도. 할아버지, 할머니도. 고모들도 모두 내 동생을 천재 아니냐며 박수쳤었습니다. 사실 앞의 이야기는 부모님께서 해주신 이야기라 제 기억은 아니지만 선명하게 뇌리에 있는 것은 제가 초등학교 입학식 전까지 한글을 떼지 못해 동생에게 매번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해야했고 몇번은 읽어주다가, 귀찮았는지 글도 못 읽는 누나는 왜 학교에 가냐며 엄마에게 질문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어땠는 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리 충격적이지 않았습니다. 저조차도 나는 유치원을 더 다니고 싶었고, 학교는 동생이 가야하는 곳 아닐까? 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빠는 낯가림이 심하셨고 세상 물정에 밝지 않아 주어진대로,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국제시장’에서 나오는 것처럼 해외노동 나가셨을 때도 동네 20년지기 친구가 간다고 해서, 아버지 직업이 건축설계이신 것도 할아버지의 자그마한 회사를 첫째인 당신이 이어받아야해서. 그에 반해 엄마는 요즘 말로 인싸 그 자체. 고향에서 18세 상경한 엄마는 주위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명동에 자주 가는 옷가게의 직원과도 사적으로 친해질 정도. 본인 말로 ‘종로일대를 지나가면 모두가 쳐다보는 패셔니스타’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분 모두 좋은 집에 태어나지 못한 장남과 셋째 딸이었기에 초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하시고 중학교도 자퇴하셨어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수학은 물론 글 읽는 것도 버거워하는 아이, 매일 골목대장이나 하며 그림그리고 손으로 무언갈 만드는 것에 푹 빠진 이 첫째를 부모님은 어찌보면 본인들의 무지를 닮은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셨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 내 그림도, 내가 부르는 노래도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셨던 것이리라 믿습니다. 체벌을 하면 열심히 할거라고 생각하셨는지 내 동생과 함께 공부하는 날에는 매일 맞았습니다. 나는 다 틀렸으니까요. 하지만 유치원에서는 때리는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장난감을 특이하게 가지고 논다며 관심있게 봐주시고,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하는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있던 자그마한 그 유치원에 나를 유심히 보시던 선생님은 나에게 틀렸다가 아닌 다르다라는 이야기를 항상 하셨습니다. ‘ㅇㅇ아, 넌 이 친구들과 다른 사람일 뿐이야.’ 저는 유치원에 못 가는 날이 너무 싫었습니다. 집에 있으면 다른 사람이 아닌 틀린 사람이 되니까요. 그래도 장남의 첫째 딸이라는 이유로 예쁨도 많이 받았습니다. 담배연기 자욱한 복덕방에 들어서서 ‘할아버지 저녁 드시래요.’ 하고 들어서면 앞니 하나가 쏙 빠져 주름이 다 질 정도로 웃는 할아버지가 나를 끌어안고 할머니댁으로 돌아간 기억. 마감이 곧이라 집중해서 일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본인이 작업한 셀지를 넘겨주며 ‘이렇게 움직이게 하는거야. 종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이라고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글 읽을 줄 몰라도 돼. 그건 앞으로 자연스러워져. 다른 나라 언어도 똑같아. 대신 그 상황과 분위기를 읽는거야.’ 하며 늦은 시간 몰래 티비 켜고 미국 드라마나 중국 드라마 등을 보여주며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고자 했던 둘째 고모. 사고뭉치 같은 게 자기같다며, 사실은 자기 딸 아니냐고 웃으며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 캠퍼스 수업에 데리고 가주었던 막내 고모. 내겐 아빠, 엄마, 그리고 동생이 없는 곳이 나를 자유롭게 했었습니다. 그저 나를 틀렸다고만 했고, 그림 그려서 출세 못한다고 하는, 공부 잘하면 뭐가 되도 다 된다는 그들이 싫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부모님과 관계가 이상하게 틀어지고 있던 것 같습니다. 글을 읽고 쓸 줄 알기 시작하면서 글이 너무 좋아 활자중독자마냥 계속해서 책을 읽었습니다. 사실은 글이 좋은 게 아니라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싶었죠.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어버려서 자치구 도서관 책을 읽기 시작해도 부모님은 나에게 칭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돌아온 엄마의 말은 ‘너 이번 수학 시험에 10점이 나왔다며? 어떻게 그런 점수가 나오니? 엄마는 그래도 어릴 때 90점 이하는 나와본 적이 없어. 아빠 닮아서 멍청한건지. 그리고 그만 좀 나가돌아다녀라. 너 버스타고, 지하철 타고, 밖에서 밥 먹는 거, 그거 다 돈이야. 동생 봐. 얼마나 차분해.’ 저는 골칫덩어리, 말썽쟁이였고, 내 동생은 똑똑하고 예쁜 극락조였습니다. 점차 부모님 집에는 돌아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할머니댁이 더 편했고 좋았어요. 할머니가 아무리 손 야무지지 못해서 내가 실수를 해도 ‘히히’하는 웃음에 궁둥이만 한번 톡 때리고 마는 정도였고 돈, 돈. 하지도 않으셨어요. 내가 동네에서 애들과 놀다 넘어지고 와도 한번도 놀란 기색없이 물 한바가지 퍼와다가 상처부위 닦아주시고 아무말없이 약 발라주신 할아버지도 계셨으니까요. 엄마에게 다친 것을 들킨 날에는 ‘여자애가 되서 애들이랑 뒤엉켜 노니까 다리가 성한 날이 없어. 너가 들개야?’라고 윽박지르셨기에 집에 돌아갈 때는 엄마가 일에 돌아오시기 전 후다닥 뛰어들어가 긴바지로 갈아입곤 했습니다. 그때 즈음부터 생각했습니다. 동생이 딸이고 내가 아들이면, 그럼 그나마 괜찮았을까? 할머니댁에서 늦게까지 놀고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습니다. 온갖 서랍이 다 열려있고 안방에선 동생이 울고 있었습니다. 흥분한 엄마와 아빠가 서 있었습니다. 말다툼과 언성이 커져 내가 들어온지도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안방으로 들어가면 부모님을 지나쳐야 했기에 나는 작은 방으로 숨죽여 들어갔습니다. 작은 방도 모든 것들이 다 뒤집혀있었습니다. “제발 내가 번 돈 좀 그대로 둬. 제발! 대체 당신은 집에서 한푼도 없이 들어와서 왜 이 난리를 치는건데!” 엄마의 울부짖음이 들렸고 그때 어렴풋이 알았습니다. 책이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레파토리같은 그것, 사기. 아빠는 우리 앞에서 한번도 소리를 크게 낸 적이 없던 사람이었는데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그깟 얼마 가지고 나 쥐어짤거면 니가 능력이 없는거야.” 돈 얘기가 너무 지겨웠습니다. 왜 우리가 가난한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요. 갑자기 벌컥, 하고 문이 열리더니 엄마가 나를 붙잡고 끌었습니다. 안방에 있던 동생도 끌고요. 우리를 아빠 앞에 앉히더니 부엌에서 칼을 꺼내왔습니다. 그리고는 아까 소리지르면서 울던 엄마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차분하고 어딘가 처음 보는 엄마가 서 있었습니다. “능력없는 애미. 뭐하러 니 애들 키우게 놔두니? 나 죽이고 다른 여자 만나서 키워. 아님 니 새끼들도 다 죽이고 인생 다시 시작하던가.” 아직도 이 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처럼 무섭고 아프지만 그때의 엄마는 정말로 죽어도 괜찮다라는 생각이였나봐요. 나는 아니었거든요. 그 칼이 동생과 내 다리 사이 장판에 꽂고 엄마는 아빠를 쳐다보았지만 아빠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나는 울지 못했습니다. 내 동생이 너무 울어서 몸을 가눌 힘이 없는 것처럼 기우뚱대고 있었고, 엄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난장판이 된 좁은 집을 다시 정리했습니다. 나도 엄마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 해야할 것 같았습니다. 이 감정이 무엇으로 토해야할지 몰라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나봅니다. 동생을 질질 끌고 안방 이부자리에 눕혀주고 이불을 덮어주었습니다. 어찌해야할지 몰라서 엄마가 치우는 그 시간 한참동안, 한권의 책을 두세번정도 반복해서 읽고서야 거실 불이 꺼졌고 힘없이 잘자라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 읽은 책은 내 트라우마 속 기폭장치처럼 되어 한동안 손도 대지 못했습니다. 워더링 하이츠. 폭풍의 언덕은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나게 해, 유리가면이라는 만화를 봤을 때도 폭풍의 언덕을 연기하는 에피소드는 25살이 되기 전까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수학을 무지하게 싫어하는 나에게 친구가 가르쳐주겠다며 집에 초대했습니다. 그 여자 친구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며 키도 큰 편이였습니다. 집도 잘 살았고요. 엄마는 친구가 부자에 공부 잘하는 아이라 다행이라며 친구의 엄머니와도 가깝게 지냈고, 그렇게 친구에게 수학을 배우기를 몇주된 것 같습니다. 갑자기 그 친구가 공부 지겨우니 놀자고 하기에 저는 너무 좋아 승낙했습니다. 병원놀이라는 이름의 놀이로 시작했는데 엉덩이 주사를 맞아야한다며 제 원피스를 배꼽 근처까지 올리고 팬티를 내려 한참 제 성기를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만지기까지 하며 여기는 뭐하는 곳이래, 이 부위를 만지면 기분이 좋대 등등 성적인 행위가 시작되어 불쾌감에 친구를 밀어내고 옷 매무새를 다듬고 나와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렇게 그 친구의 집에 가지 않게 되자 엄마는 아예 공부를 포기했냐며 한숨을 쉬셨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등교길에 마주칠 때마다 그 친구가 나를 보고 방긋 웃어주었지만 나는 따질 수 없었습니다. 엄마와 항상 등하교하는 친구와 항상 혼자 등하교 하는 나. 그 자리에서 왜 나를 만졌냐고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그땐 내가 친구와 싸워서 더는 만나기 싫다고 변명하는 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이 되던 해. 동생은 나보다 키도 커지고 힘도 세지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에서만 있는 것이 좋은 동생은 내가 친구들 집에 데려오는 것이 싫었나봅니다. 그렇게 한번 친구들을 데려와 시끄러워진 이 집이 싫어진 동생은 나에게 주먹질을 했습니다. 친구들은 얼음이 되었고 나는 당황스러워 그저 맞고만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차례 맞고나서야 동생은 다 나가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친구들은 질린 표정으로 나갔고, 나간 것에 만족한 내 동생은 안방으로 들어가 비디오 게임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맞는 것에 나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맞은 자국을 본 엄마는 대수롭지 않아했고 동생을 크게 혼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너가 힘이 너무 세서 그렇게 장난치면 누나가 다쳐.’라는 말 뿐. 그런 주먹질은 장난이 아니라 폭력이라고 말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의외로 저는 어렸을 때도, 지금도 바깥에선 특이하지만 재미있는 친구였습니다. 학우 관계에서 잠깐 따돌림을 당한 적은 있어도 먼저 관계해결을 시작해서 오히려 따돌림을 주도하던 친구와 잘 지내게 되었고, 초등학교 때 처음 만나 이제는 같이 서른을 바라보는 친구가 있거든요. 여전하게 공부는 그다지 잘하진 않았지만 중상위권 정도는 유지했습니다.하지만 책을 많이 읽을수록 빠져드는 작가가 생기고, 감정이나 사물을 표현하는 미술이 좋았고 모든 것을 잊은 채 가사 속을 집중하는 음악이 좋았습니다. 백일장에서 글을 쓸지 그림을 그릴 지 고민하고 싶지 않아 항상 원고지와 도화지 두개를 챙겨서 둘 다 했고 상을 받는 일도 종종 있었으며 음악 선생님은 영재원 시험을 보지 않겠냐고도 하셨습니다. 첫 임용으로 오신 미술 선생님은 방과 후에 따로 시간을 내어 제대로 붓 쥐는 방법, 파스텔은 갈아서도 쓸 수 있다는 것 등 처음 교사가 되어 쏟아주는 열정, 본인의 모교인 예술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며 처음으로 입시를 준비하는 미술도 했습니다. 이렇게 나는 밖에선 예쁨받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돈이 많이 드는데 벌지도 못하는 것만 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못해 한숨쉬며 ‘상타서 기분 좋겠네, 우리 딸. 잘했어.’ 라는 말이 내겐 큰 벽이었습니다. 왜 난 한번도 부모님을 만족시킬 수 없는거지? 나는 왜 완벽하지 않을까? 예고나 미고는 입학금이 부담스러워 포기하고 특성화라는 말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클래식보단 실용음악 쪽이나 미술은 어떻게 대체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던 막내고모의 말 한마디가 지금까지 머리에 남습니다. “내가 미술은 조예가 없다시피 하지만 도화지 위나 석상정도에 담는다고 하면, 나는 전기배선 위치부터 석고보드, 벽지 하나하나 결정하고 그려내서 사람의 인생을 담는 공간을 만든다.” 디자이너? 무엇인지 사실 잘 몰랐습니다. 우리 고모, 티비에서나 비춰주는 근사한 흰색 머리 패션 디자이너, 만화 ‘나나’ 덕분에 아는 비비안웨스트우드 할머니 정도? (칼 라거펠트, 확고하고 멋진 인생을 사셨습니다. 남겨준 것들에 감사합니다.) 근데 그렇게나 다양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좋았습니다. 무턱대고 집에서 한시간 거리의 디자인고에 서류를 냈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허락해준 이유는 입학금이 저렴하거나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사업이 워낙 많아 드는 돈이 인문계보다 덜 들었거든요. 취업도 잘되는 건 덤이었고요. 집과 멀수록 집에서의 고통은 줄어들 줄 알았지만 아니었습니다. 내 동생은 내가 고등학생 때까지 줄곧 맘에 들지 않거나 불쾌한 감정들을 폭력으로 표현했고 결국 고3 때 엄마에게 ‘가족상담을 받는 건 어떨까.’라는 이야기를 꺼냈지만 엄마는 부정했습니다. 자신의 극락조가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이 엄마에겐 큰 고통이었을 수 있겠죠. 끝내 엄마는 ‘아들이 조금 예민한 것 뿐이야.’라고 답할 뿐이었습니다. 골칫덩이이고 나쁜 아이인 첫째의 감수성은 예민이 아닌 틀린 것이지만 극락조인 둘째의 폭력성은 성격의 예민인 것이었습니다. 나는 안과 밖이 분명한 사람으로 완벽하게 살았습니다. 중증 우울증의 소견이 보인다는 미술 상담 때의 이야기도 무시했습니다. 유독 유리가면이라는 만화에서 그 에피소드만 빼고 만화를 읽는 나에게 질문하는 것도 대충 얼버무릴 수 있었습니다. 학교 상담 때 ‘정신과를 가는 게 아니고 센터에 가는거야. 무서운 게 아니란다.’ 라고 권유해도 웃으며 괜찮다고 했습니다. 나의 우울은 집에서만 있으니까. 바깥은 날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비록 헛된 꿈이지만 소망했던 일본 유학을 위해 공부해둔 일본어도 내게 남아있었고, 선생님이 좋아서 열심히 했던 영어도 나에게 새로운 국가의 친구를 만들 수 있게 해줬습니다. 불안하고 어려운 순간을 지나게 해준 것들은 모두 바깥에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아는 친구와 모르는 친구가 있지만 그래도 그들은 내게 똑같은 친구란 모습으로 진솔하고 솔직했습니다. 그저 얼른 부모님과 다른, 어른이 되고 싶어 시작했던 19살 때 회사생활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했지만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간다고 했던 것 같아요. 멋지다 생각한 그 흰머리 올곧게 묶은 아저씨를 바라보고 꿈꾼 패션이란 시장은 너무 힘들었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아 그래도 부여잡고 있다가 놓아버렸을 때도 날 지지해준 것은 바깥이었습니다. 모두의 인생은 참으로 드라마같습니다. 우울하고 고통스럽고 찢겨지고 무기력하고 온통의 어두움이 오히려 행복할 때, 저는 참 운이 좋게도 나를 지탱해주고 지금까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아왔습니다. 이젠 어느덧 독립을 하고, 경력으로 보았을 때 나쁘지 않은 편이고, 작은 회사라 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29살에 팀장을 달고 디자인팀이란 고잉메리호를 이끄는 루피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처럼 나 치료 필요없어! 하고 무시하지 않고 마음이 온전하지 않을 때는 스스럼없이 병원이나 상담센터를 찾습니다. 전문적인 부분은 전문가가 제일 잘 아니까. 그렇게 변할 수 있었던건 부모님의 늙어버린 모습? 그런 부분도 없잖아 있긴 합니다. 부모님과 나의 나이차이는 거진 40살 정도 나니까요. 그들도 부모가 처음이었으니까요. 아쉬운건 저 또한 인생이란걸 살아보는 게, 누군가의 딸인게, 첫째인 게, 사람인 게 처음이였던 것 뿐. 하지만 근처에 앉아 같이 예능보며 웃고, 누나는 자주 샀으니까 이번엔 내가 살게-라며 쑥쓰러운 듯 돈을 내밀고, 관심있는 여자애에게 어떻게 연락해야할지 몰라 나에게 하나하나 물어보고, 진심으로 미안하고 그 상처에 대해 사죄한다고 울었던 내 동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 속으로는 이미 용서했지만 그렇게 용기내어 사과하고 진심으로 눈물 흘리고 마음 다해 다시 누나와 동생의 관계라는 것을 만들고자 하는 이 친구가 모든 일을 용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고 더불어 나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겠더라고요. (곧 30살인데 좀 늦었나요?) 문신을 좋아합니다. 제 왼쪽 팔에는 제 이름의 한자와 그 이름의 예쁜 뜻인 ‘세상에 처음으로 뜬 별’을 형상화한 블랙워크가 있고 등에는 척추따라 제 좌우명이 있습니다. 오른쪽 팔꿈치 위엔 약 17년지기(세기도 힘들기 시작) 친구와 우정타투로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나 탄생석을 새겨 온통 ‘나’로만 도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뒷목에 로자리오가 자리합니다. 여태껏 키워온 나의 분노, 우울, 슬픔을. 내가 누군가에게 쏟아낸 분노와 우울을. 거짓됨을.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들을. 내가 고통스럽게 했던 것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용서빈다는 의미로 자리매김합니다. 어떤 타투이스트가 농담으로 그러더라고요. ‘허락보다는 용서가 쉽다.’ 여기까지 귀하신 시간 내어 읽어주신 당신의 힘듦이 혹시나 본인 스스로라면 용서하세요. 다른 이를 용서하라는 말을 하기엔 저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ㅎㅎ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 그렇게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인생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자신을 용서하세요. 행복은 자연스럽게 올겁니다😊
버는확실히TMI내자신스트레스우울만족해행복해하나에도행복합니다내인생지금은자신을감사해칭찬해트라우마치과교정교정비용많네요용서하기자기이야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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