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아빠는 교도소에서 있던 사람이었고 그런 - 익명 심리상담 커뮤니티 | 마인드카페[왕따|폭력|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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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콩_레벨_아이콘pinkchoco25
·3년 전
어린시절 아빠는 교도소에서 있던 사람이었고 그런 아빠는 엄마와의 결혼이 재혼이었다. 엄마는 외할머니의 가부장적인 학대로 어린나이에 외할머니와 연을끊고 집을 나가서 아빠를 만나 나를 임신하고서야 외할머니를 찾아가 결혼 승낙을 받았다. 아빠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동생 집에 맡기고 엄마와 결혼하여 살던 중 교도소를 갔고 엄마는 홀로 저와 동생을 키우며 이복오빠에게 생활비까지 보내며 힘든 삶을 사셨다. 교도소를 여러번 다녀온 아빠 였고 그것은 좀 커서 할머니에게 들을 수 있었다. 엄마는 성격이 불같은 분이셨다. 내가 물을 쏟는 등의 작은 실수에도 크게 화를 내셨고 나를 훈육할때 폭력적인 편이셨다. 내게 엄마는 편하고 의지할수 있는 존재 보다는 무서운 분이었기에 혼날일이 없도록 말도 아꼈고 그래서 엄마는 내가 옆에 있는것 조차 잊게할 정도로 조용한 아이였다고 후에 말했다. 내가 중학생이 되고서 어린나를 때린것에 대해 사과를 하셨지만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불만스러워 하셨다. 어느날 엄마는 나에게 이모집 다녀온다며 집을 나가 몇날 몇일을 소식을 끊고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아빠는 밤에 집에오면 나를 차에 태워 엄마를 찾아다녔다. 아빠는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엄마가 무슨일을 했는지 아느냐며 그동안 술집에서 엄마가 일한것을 말해 주었고 아빠가 방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을 들었는데 정 안되면 나와 동생을 고아원에 보내야겠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외할머니에게 말하여 동생과 외할머니댁에서 지낼수 있었다. 그러다 엄마와 연락이 되었고 엄마는 다른 곳에서 돈을 벌고 있으니 외할머니랑 지내고 있으면 데리러 오겠다 하셨다. 한달에 몇번 엄마가 우리를 만나러 오셨고 나는 엄마와 다시 살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지냈다. 이 때가 엄마와 내가 가장 사이가 좋았던 시기였다. 외할머니는 모두가 생각하는 따스한 할머니는 아니셨고 남아선호사상이 강하며 기독교에 빠진 개인주의적인 할머니셨다. 반찬은 매일 된장찌개였고 된장찌개는 먹어도 먹어도 자꾸 불어났다. 동사무소에서 동생과 내게 지원되는 반찬은 같이사는 사촌 오빠에게만 차려주시면서 나와 동생에게 매주 교회에 같이가기를 강요 하셨고 내가 중학교에 가면서 교회를 거부하면서 외할머니와의 트러블이 심해졌다. 견디다 못한 나는 엄마와 살기를 요청하였고 엄마는 알겠다며 저와 동생을 데릴러 와서는 사실은 남자와 같이 살고 있다고 하셨다. 그말에 나는 무감각했다. 날버리고 가선 다른남자와 산다는데 지금 생각해도 이상했다. 엄마도 어떻게 그리 담담하냐며 신기해 하셨으니까 그남자는 결혼도 안해본 남자였고 나와 나이차이가 20살도 안났으며 남자쪽 집에선 엄마를 처녀로 알고 있었기에 같이 살게 됐어도 밖에선 엄마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셔서 이모라고 불러야 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와의 외출을 되도록 피했다. 나는 그남자와 살면서 나와 동생 때문에 떳떳하지 못한 엄마를 보며 어서 성인이 되어 독립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때 첫 전학한 이후로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상하게 초등학교 생활의 기억이 전혀 없는데 전학가기 전까지 내가 친구가 많았고 매일같이 친구들이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전학간 이후 입학한 중학교에서도 전학간 중학교에서도 친구 사귀는게 어려워 왕따였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그것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을 엄마나 다른 가족에겐 숨겼다. 엄마의 상황을 아는 맏딸이었기에 성인이 되면 집에 보탬이되고 엄마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엄마는 바라셨기에 내가 그 남자와 마찰이라도 생기려 하면 엄마는 자신이 그남자에게 우리까지 떠맡기며 미안한 상황인데 너가 나를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며 참아주길 원하셨다. 그런 엄마에게 학교에서의 생활을 알릴 수 없었다. 왕따가 되기 싫어서 내가 싫다고 하는 친구에게 잘보이려 노력했고 혼자 급식 먹는것이 싫어 매일 점심시간에 밥을 먹지 않았다. 소풍을 가도 나는 혼자 사람 없는 곳만 찾아다니며 구석에서 밥도 먹지않고 시간을 때워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한 나는 엄마와 상상할수 없을만큼 자주 다투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직장을 구하자 마자 나를 불러 집에 빚을 네가 갚아줘야 한다며 월급 80만원 중에 50만원을 달라고 하였고 나는 당연하게 알겠다고 했다. 첫 월급을 받은날 사장님이 현금으로 주셔서 생에 처음 생긴 큰돈을 잃어버릴까봐 내 몫인 30만원은 통장에 넣고 50만원만을 엄마께 가져다 드렸는데 엄마는 그것에 크게 분노하셨다. 빚갚으러 왔냐며 온집안이 떠나가라 소리치셨고 나는 이게 왜 혼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아마도 이때 엄마에게 갱년기가 찾아왔고 내가 성인이 되며 바뀌는 모습이 거슬리셨던거 같다.) 엄마는 내가 납득하지 못할 것들을 불만스러워 하셨다. 티비를 몇시간을 보느냐 하셔서 방에 들어가면 방에 쳐박혀 나오지 않는다며 불만이었다. 그냥 내가 뭘하던 다 문제로 삼았다. 그렇게 화낼때마다 엄마는 집을 나가라며 가방을 던져주었고 내가 가만 있으면 왜 버티고 있냐며 더 화를 내셨다. 그래서 나가야 하나 싶어 지낼곳을 알아보고 엄마께 말씀드리면 너가 나가면 빚은 누가갚냐며 못나간다고 막았다. 그남자와 여동생은 내가 당하는 것에 방관하며 엄마에게 맞장구 쳤다. 하루는 그렇게 부딪히고 나서 방에 있는데 나만 빼고 가족들이 밥을 먹으면서 누구 하나 밥 먹으란 소리가 없었다. 조용히 나가서 슈퍼에서 빵이랑 우유를 고르는데 옆빌라에 살던 친구 어머님을 만났다. 그전에도 친구집에 왕래하면서 어머님과 안면을 터놓은 상태였고 어머님이 밥시간에 빵을 먹냐면서 더골라보라고 하며 대신 계산을 해주셨고 그걸 내방 침대에서 먹고있는 내 현실이 너무 비참했다. 친구들은 왜 그걸 당하고 있냐며 이해못한다는 반응이었지만 내가 나가면 어린 동생에게 화살이 돌아갈까봐 참고 버티던 중에 또 엄마가 나에게 화를 내며 집을 나가라며 안방에 들어가셨고 나는 방에서 있는데 여동생이 들어와서 "왜 안나가? 너 때문에 엄마가 힘들어 하잖아, 나가죽어 왜 살아 나가 죽어버려"라는 말에 충격을 먹었고 막말하는 동생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 모습에 이 집에 있을 필요가 없다 생각하여 조용히 화장품과 지갑 휴대폰만 챙겨 집을 나와 친구에게 신세질수 있도록 부탁했다. 학창시절 통금 7시라는 엄격한 엄마의 규율때문에 친구집에서 자는것조차 상상할수 없었던 내가 친구집에서 자는 첫 경험을 할수 있었고 집에서는 집나간것을 알고선 그 남자와 동생의 내가 얼마나 나쁜년인지를 말하는 비난 문자가 이어졌다. 친구집에서 자고 출근을 했는데 그남자가 직장에 전화까지 해서 제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알렸고 만나주지 않으면 직장에 찾아오겠다 하여 만났다. 햄버거집에서 만난 그남자는 엄마가 얼마나 나때문에 힘들어하고 속상해하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되새겨주며 당장 들어오지 않으면 다신 받아주지 않겠다 하였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그것이 어서 들어오라는 엄마의 뜻이라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몇주간의 트러블과 엄마의 태도에서 진심이라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친구집에서 지내는 이틀동안 받은 문자만 보더라도 내생각이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사표를 내고 다른지역으로 가서 20만원짜리 고시텔을 잡고 룸살롱 거리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며 살았다. 빠른년생이라 19살에 졸업한 나는 미성년자라는 제약 때문에 일자리 구하는것도 어려웠기에 60만원에 12시간을 일했다. 그런동안에도 나를 비난하는 그남자의 문자들이 계속 되었고 참다못해 결국 번호를 바꾸며 집과는 영원히 연락을 끊게 되었다. 집을 나온것에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자유로움에 행복했고 해방감 마저 느꼈다. 일주일에 한번 친구를 만날때도 눈치보며 허락을 구해야 했고 어디서 뭐할지 누굴만날지 세세하게 말하고도 6시까지는 들어와야 했다. 그렇다고 매주 약속을 잡지도 못하게 하셨다. 그런데 집을 나오니 누구를 만나러 가는것이 죄스럽지 않았고 내가 들어가고 싶을 때 들어갈 수 있었고 외박도 가능 했다.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고 옷 두벌로 생활해야하는 것들을 빼면 심리적으로 더 안정감 있었고 자유가 있었다. 가족에게서 받는 폭언과 따돌림도 없었다. 그렇게 10년을 살았다. 살면서 무조건적인 내편이 없다는 불안감 돈이 없어도 돌아갈수 있는 집이 없다는 불안감 존재만으로 사랑받을 수 없다는 불안감으로 대인관계가 여전히 어려웠고 나를 찾지 않는 엄마와 동생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나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늘 나보다 상대를 살펴야 했다. 하지만 이런 내 결점은 약점이 되었고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가 쌓이며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에 대한 기대도 믿음도 없어지면서 친구들을 다 끊었고 사람을 만나는거 조차 싫어지게 됐다.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다녔고 사람과 눈맞추고 이야기하는것이 불편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그렇게 5년넘게 최소한의 경제생활로 연명하며 하루하루 시간을 보낸다. 매일밤 잠들기가 어렵다. 눈을 감으면 내일이 오는것이 두렵고 쫓기는듯하다. 문득 침대옆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어지고 길을 걸으면 어느 건물이 제일 높은지 찾으며 저기서 떨어지면 죽을까 하는 생각한다. 연예인 누가 자살했다 하면 어떤 방법을 썼을까 하며 죽음에 성공한 것에 부러워한다. 죽는것도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죽는 방법이 무서워서 못하고 있는 내가 밉다. 한동안 극에 달한 내가 손목에 몇차례 시도 했지만 겁이나서 깊이 긋지 못해 흉만 남았다. 컴퓨터 전원처럼 종료 버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버튼 하나 눌러서 꺼진채로 영원히 켜지지 않았으면.. 인간도 안락사를 선택할수 있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겐 사는것 자체가 고통이라 죽을수 있게 해주는 것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까? 다음 생을 산다면 존재만으로도 사랑받는 생명이길 사랑이 넘쳐서 기분 좋은 에너지로 가득한 생명이길
조울스트레스받아스트레스트라우마불만이야의욕없음무기력해우울해답답해불안해불면힘들다화나공허해우울혼란스러워슬퍼괴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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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가 달렸어요.
커피콩_레벨_아이콘
aass1273
· 3년 전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는 꽂길을 걷기를 기도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