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4월 봄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여자라는 이유로 친할머니는 인상을 쓰시며 본인 집에 들이지도 말고 돌려보내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내가 3살쯤에 엄마는 한글나라 과외 일을 하셨다. 엄마와 떨어져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 과정에서 엄마와의 애착형성이 되지 않았던 나는 분리불안이 생겨 선택적 함묵증에 걸렸다.
특정 상황이나 사람 앞에서 마음을 닫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인데, 가족이 아닌 남들과는
거의 의사소통을 하지 않았다.
5~6살쯤 아빠가 어린이집 차에 나를 태우려고 하실 때, 나는 아빠와 분리되는 것에 불안을 느껴 서럽게 울었다. 결국 그날 어린이집을 그만 다니게 됐고, 유치원에 들어가게 됐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또다시 입을 닫고 살았다. 정말 친한 친구 몇명에게만 말을 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안정된 애착이 형성되지 않아 마음 한구석에 상처가 남았으나 한편으로는 막내라는 이유로 사랑을 많이 받아 낙관적이고 밝은 성격이었던 나는 웃음도 많았는데, 초2때 소리내어 웃으니까 옆에 앉은 짝이 "얘는 말은 안하는데 웃기는 하네"라고 상처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멈추고 '나는 웃으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 그 뒤로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포커페이스로 살았다. 웃겨도 웃지 않고 슬퍼도 울지 않고 화나도 화내지 않았다. 그냥 감정 자체를 숨기는 게 일상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친한 친구에게는 말을 했지만, 고학년이 되고 애들이 머리가 크면서 조금씩 나를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친해지고 싶어하는 친구들은 많았지만, 내가 벽을 뒀다.
처음부터 오롯이 혼자였지만 철저하게 고립됐다.
중학교에 입학했다.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것마저 끔찍하게 싫어서, 긴 머리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떨구고 소리없이 무표정으로 걷던 나는 '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나는 모르는데 나를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장난으로 "네 뒤에 귀신 붙었다"며 웃는 아이도 있었다. 나를 보는 학교 사람들의 시선은 이렇게 나뉘었다. 나를 무서워하거나, 예쁘게 보거나, 호감을 갖거나, 무시했다. 중2때는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부탁을 하셨는지, 나에게 인사하고 말을 거는 아이들이 유독 많아졌다. 그렇게 많은 관심을 받아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깨인 시기였다.
대답할 기회가 많았는데, 말을 걸면 대답하고 싶었는데 목 끝에서 걸려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가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내가 갑자기 말을 하면 나를 알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어색하고 낯간지럽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강했다. 결국 위클래스 상담 선생님이 나에게 친구들을 붙여주셨다.
평소 나에게 자주 말을 걸던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그때마다 대답할 기회를 놓치곤 했다.
그 아이들은 점점 지쳐갔다. 결국 나는 버려졌다.
또다른 무리와 어울리게 된 나는 그 무리 안에서 은따를 당하며 힘들어했다. 또다시 나는 버려졌다. 2학기 때 조금씩 말을 했지만, 제대로 말을 트기 시작한건 중3때였다. "응, 아니"부터 시작해서
긴 문장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 건 중3때가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대인관계가 생겼다. 그러나 한 친구에게 자주 끌려다녔고 이용당했다. 사회경험이 부족한 나는 순진할 수밖에 없었고, 내가 딱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한 친구는 그만큼 약을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나와는 정반대인 사교적인 친구를 사귀게 됐다. 덕분에 나도 많이 밝아지긴 했지만, 서로 너무 다른 과거를 가진 그 친구와는 부딪힐 일이 참 많았다. 난 또다시 이용당했고, 버려졌다. 고3때 담임선생님은 반 아이들 한명 한명 돌아가며 그 아이 욕을 하면서 쪽을 주셨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같이 밥 먹는 친구 중 한명은 돈갖고 사기를 쳤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배신감이 컸다. 그 두 사람 때문에 나는 분노조절장애에 걸렸다. 매일 집에서 소리지르고 계속 ***을 퍼붓고 집에 있는 욕조와 서랍장과 창문을 깨부쉈다. 점점 괴물이 되던 나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새로운 환경을 접하다보니 분노가 가라앉았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 즐거운 생활을 보내던 나는 대학교 친구들이 생각보다 순수하지 않다는 점과, 내 과거를 남에게 알리기 두려워한다는 점을 확실히 깨달았다. 나와 더 깊이 친해지고 싶어하던 친구들을 내가 밀쳐냈다. 단단히 벽을 세웠다. 미친 과제량과 대인관계와 정신병과 몸에 생긴 병과 엄마의 암 판정 및 수술과 항암치료, 집안일과 통학시간으로 힘들어하던 나는 결국 휴학 신청을 했다. 한동안 정신과와 상담치료를 병행하며 중간에 응급실에도 가고 엄마의 병 간호도 하고 집에서 무기력하게 쉬었다.
엄마가 아프시니까 딸인 내가 시집살이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친할머니가 3일에 한 번씩 우리집에 찾아오셔서 여자인 네가 살림해야한다며 압박을 주셨다.
난 죽음과 가까워진 엄마의 부재와 그에 따른 모든 내 생활패턴과 상황들이 꼬여있었기에
도저히 그걸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아빠가 이럴거면 저희 집 찾아오지 마시라고 친할머니께 크게 화를 내고 나서야 찾아오지 않으셨다. 1년 뒤 엄마는 암 전문 요양병원을 퇴원하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셔서 안정감이 느껴졌고, 예전의 집 분위기가 살아나
내 정신건강이 많이 회복됐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복학을 했다. 난 아니었지만 계산적인 느낌을 풍기던 대학 동기들은 내가 휴학해서 자주 못 본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멀어진 듯싶었다. 단톡에서 1년전 나만 빼놓고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기들이 고민을 얘기할 때마다 상담해주던 나는, 정작 내가 고민을 얘기할땐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결국 배신감을 이기지 못해 신중하게 고민한 뒤 3년째 알고 지낸 동기들을 손절했다. 그리고 스물셋, 힘든 시기에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고 배려받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자기밖에 모르는 어린 오빠였다. 날 너무나 외롭게 만들었다. 비가 많이 오던 날, 피곤해서 잠시 잠을 자겠다는 거짓말에 속아 방을 잡았고 검은 손이 찾아와 나를 꺾어버렸다. 방 안에서 날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그는 방을 나온 뒤에 표정이 굉장히 차가워졌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사랑을 나눈 뒤에 상처받은 나의 이별통보로 헤어지게 됐다. 꽤나 자주 의지하고 소통했던 지인들은 나의 연애에 대해 온갖 오지랖과 욕을 퍼부었다. 기만이었다. 또다시 3년째 알고 지낸 지인들을 손절했다. 최근에는 보육실습중이다. 열악한 환경인 가정 어린이집을 실습처로 선택한 나의 탓이 컸다. 하루종일 붙어있으며 일을 가르쳐줘야 하는
내 지도교사는 상도덕도 모르는 인간이라
입에 담지 말아야 할 말들을 일삼고,
실습생이자 학생인 나에게 갑질을 하는 게 일상이다. 여기에 다 적지는 못했지만
정말 아프고 초라하고 고독한 인생이다.
죽고 싶다. 난 이제 모든 게 지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