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의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합니다. - 익명 심리상담 커뮤니티 | 마인드카페[공황|상담|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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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저의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합니다.
커피콩_레벨_아이콘whiteturtle3948
·3년 전
저는 현재 21살. 이야기가 좀 길어질것 같군요. 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학구열이 강하기로 유명한 곳중 한곳에서 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전 흔히들 생각하는 그런 빡쎄게 살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주변 모든 학우들에 비해 게을렀고, 평범했습니다. 그곳에선 오히려 저같은 사람이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어떻게든 중위권은 하면서 버티다가.. 전 결국 고등학교 2학년때 모든 학업을 관두게 됩니다. 여러가지 이야기가 생략되어있지만.. 저는 중학교시절부터 점차 자신감, 자존감을 잃어갔고 자기혐오에 빠졌습니다. <해야한다는걸 알면서도 안하고, 매순간이 변명이며, 의지도 노력도 없으면서 모든걸 얻고싶어하는 ***. 남들 다 하는건데 배부른 ***, 약한소리나 하면서 변명하는 비겁한 새끼. 의지라고는 1도 없고 학원에 돈 갖다바치는 ***새끼. 돈 잡아먹는 식충이> 이런것들이 저에 대한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정말 한계에 다다른 저는 학교, 학원이라는 공간에 있는것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럽고 숨이 턱턱 막혀와 더이상 그 무엇도 할수 없었습니다. 급격한 스트레스에 발작을 일으켰고, 소화불량에 시달리며 먹는것마다 토해 식도염에 고생하면서 살도 9키로 가까이 빠졌습니다. 내 스스로가 쓰레기, 한심하고 존재가치 없는인간이라는 생각을 하며 매일을 보냈습니다. 공부는 안해도 졸업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부모님, 학교 선생님들과 상의를 통해 아침에 출석만 찍고 집에 오는 식으로 어떻게든 출석일수를 채워나갔습니다. 학업을 관두고 심리상담도 받으며 약물치료까지 병행했지만 저의 우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과의 갈등도 있었습니다. 저를 걱정해 기다려주시고 지원해주시려 했던 부모님이었지만, 그분들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신데 당연히 불안하고 초조하셨겠죠. 그때의 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합니다.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있기만 할거냐 꾸짖으셨던 엄마. 인생 그따위로 살지 말라고 소리 지르셨던 아빠. 저는 우울증, 공황장애를 앓으면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이 아닌, 어떻게든 억누르고 숨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속이 썩어들어가든 말든. 어떻게든 밟아 누르는 법을 배웠습니다. 저에게 집이란 마음편히 쉴수 있는 곳이 아니였습니다.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웃지는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울지는 않아야 하는 그런곳이었습니다. 다들 내 눈치를 보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나때문에 우리집 분위기가 무너졌다는 생각에 자기혐오는 깊어져만 갔습니다. 이럴바에야 애초에 힘든걸 들키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애초에 수학학원에서 발작이 와 수학선생님이 부모님께 연락을 하지만 않았어도, 난 끝까지 부모님한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픈거 뿐이고, 그건 잘못이 아니라고 누군가가 말해줬지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결국 모든게 다 내잘못이라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전 자책하는게 제일 힘들었습니다. 차라리 내가 혐오하는게 다른 대상이었다면 탓을 돌릴수 있었겠지만, 내가 제일 혐오하는건 나 자신이었습니다. 성격조차 변해갔습니다. 어릴때도 그리 막나가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스스로에 대한 모든 확신을 잃어갔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 생각 무엇 하나 옳다고 확신할수 없었습니다. 쉽게 흔들리고 휘둘리는 사고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다가 개개인의 가치관의 차이를 벗어나 옳고 그름의 문제까지 혼란스러워 하는 내가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 뒤로도 저의 고등학교 시절은 쭉 가관이었습니다. 매일이 무기력했고 우울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자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자해는 끊임없이, 살갗이 얇게 벗겨질때까지 손등을 긁는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여느 날처럼 숨이 가빠오고 심장이 미친듯이 뛰던 어느 순간 갈곳 잃고 방황하던 내 손이 스스로를 향했습니다. 손등을 긁었고, 피가 나고 얇게 벗겨질때까지 긁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보며, 몰려오는 쓰라림을 느끼며 저는 묘한 차분함을 느꼈습니다. 차분함 이라는게 정확한 표현일지는 모르겠네요. 어찌됬든 저는 그 이후로 기분이 안좋고, 심장이 미친듯이 뛸때마다 자해를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커터칼로 팔등을 긋기 시작했습니다. 벌어지는 살과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있으면 진정되는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의 팔등은 상처로, 흉터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화를 내셨습니다. 가슴이 아파서 그랬다는거.. 압니다. 어찌됬든 저는 유일하게 조금이라도 제 기분을 풀수 있던 방법마저 엄마의 눈치를 보며 못하게 되었습니다. 숨이 가빠오는 순간에도 사람들 앞에서 태연한척 하는법을 익혔습니다. 어떻게든 억누르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수면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워낙에 잠이 엄청 많은지라 공부할때도 잠을 조절하지 못하는게 너무너무 힘들었어서, 남들이 스트레스 받으면 잠을 못잔다느니, 불면증이 생긴다느니, 그런 말들은 저에게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수면 문제는 달랐습니다. 악몽은 뭐 그래도 익숙했습니다. 중학교때부터 악몽은 종종 꿨습니다. 다만 우울증이 심해지고 나서부터 그 빈도수는 급격히 늘었고, 꿈을 꿨다 하면 매번 악몽이었습니다. 쫓기고, 죽임당하고, 나때문에 주변사람들이 죽고, 공포스러운 꿈들을 꿨습니다. 낮동안 참고 지내는 화, 슬픔, 발작이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며 몰려오듯이 저는 자는동안 숨을 가쁘게 내쉬었고 발버둥쳤습니다. 허억! 하며 깼고 뒤척였으며 잠을 설쳤습니다. 힘들었습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안그래도 힘들었던 나를 더 힘들게 했던 또다른 존재는 바로 아빠였습니다. 저에게는 저보다 2살 많은 언니가 있습니다. 아빠는 언니와 저에게 어릴때부터 경영, 회계 이런것들을 공부하라고 말씀하셨고, 나아가 그런것들이 아니면 다 의미없다, 쓰잘떼기 없다 라며 우리의 꿈을 부정했습니다. 안그래도 어린 중학생 정도 나이 학생이 자기 하고싶은거 찾는것도 어려운 일인데, 저희는 그런걸 생각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길이 아니면 지원은 없다. 너 하고싶은거 할거면 니돈으로 니 능력으로 해라. 이게 아빠의 뜻이었으니까요. 우리에게 선택권따위는 없었습니다. 돈으로 우릴 휘둘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즈음 저의 우울증이 부각되고 심각해지면서 아빠는 뜻을 좀 굽히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바뀌지 않더군요. 우울에 잠겨있던 어느 날 아빠가 제 방으로 와 말을 걸었습니다. <너 하고싶은거 찾아봐. 니 인생인데 너가 하고싶은거 해야지> 나를 위하는듯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온 말이 저를 무너뜨렸습니다. <하지만 지원은 안해줄거야. 니가 그냥 너 하고싶은거 아무거나 해 너 스스로.> 역겨웠습니다. 정말 역겨웠습니다. 아빠는 큰소리를 내거나 감정이 크게 왔다갔다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매번 잔잔한 말투로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럴거면 날 위하는 척이나 하지 말지. 그따위 말 할거면 닥치고나 있지. 날 위한답시고 한다는 그 말들이 위선적이고 역겨워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아빠가 그 말을 하고 내방에서 나간 뒤, 전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집에서 악을 쓰면서 소리를 질러대며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안방에 계시던 아빠가 다시 내방으로 오셔서 소리를 지르시더군요. <인생 그따위로 살지 마> 평생 큰소리 내는걸 거의 본적 없던 분입니다. 제 정신세계는 그날 한번 무너졌습니다. 평소에 우울한걸 정신줄 놓는다고 표현한다면, 그날 제 정신줄은 불타 사라졌습니다. 어떻게든 정신 차리는데 일주일이나 걸렸습니다. 멍 하니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신감각이 무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엄마는 다음날 제 기분을 풀어주시겠다고 아울렛에 데려가서 기분전환도 하고 쇼핑도 하고 그랬지만 저는 그때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할수 없었습니다. 몆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이 떠오를때면 눈물이 납니다. 그냥 우는것도 아니고 서럽게 울게 됩니다. 그런 기억입니다.
힘들다화나답답해괴로워공허해호흡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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