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사람에게 나는 취향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아 - 익명 심리상담 커뮤니티 | 마인드카페[상담|자살|집착]
알림
심리케어센터
마인드카페 EAP
회사소개
black-line
커피콩_레벨_아이콘trashy
·3년 전
그사람에게 나는 취향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사랑해도 취향이 아니라면 취향인 사람을 택하는게 당연하다  예를 들어 수진이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해도 (물론 수진이와 나는 그냥 친구였지만) 나는 서희가 더 좋았던것처럼  이건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당연히 외부에 민감한 동물이고(그럴 수 밖에 없다 시각이 제1의 기관으로써 정보를 전달하며 인류 생존과 발전에 있어 시야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외부를 받아들이는 5감은 잠재된 위협들을 감지하고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들이었고 인간은 여타 동물들과 비해 강력한 근육이나 이빨, 발톱등을 지니지 못했기때문에 외부의 위협에 항상 민감해야만 했다) 이사람의 하나 하나 모든게 와닿아야 한다.  자 잘 생각해보자  누군가에게는 내가 취향일 수 도 있다 이세상 대충 여자 30억중에 2~30대 라고쳤을떄 최소 3억의 여자가 있고 3억의 취향이 있는데 3억은 개개인이 다다르나 어느정도 대중성이라는게 존재한다. 나는 대중성에서 꽤 많이 벗어난 곳에 위치해 있다만(이것은 뇌피셜이며 내가 나를 뒤틀리게 보는 시각일 수 있다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 그 대중성과 얼마나 가까이 가는가는 나의 노력여하에 따라 다르다, 고로 노력을 한다면  파이를 늘릴 수 있고 대중성과 가까이 가면 갈수록 파이는 늘어난다, 고로 3억중에 최소한 10명정도는 내가 취향일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그 10명을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다른 문제이지만 일단 만날 수 있다라고 가정하자 나는 전세계를 다닐 것이며 나의 꿈을 살것이기에 스쳐가는 인간의 수는 셀 수 없을 것이고 나는 일정 수준의 영향력을 가지고싶기에 그 파이는 더욱 커질것이며, 이런 하찮은 숫자 놀음이나 열등감에 빠질 필요는 없다, 본질적인 외로움은 절대 사그라들지않는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회성이 인간 생존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생존하기위해서 뇌가알리는 신호이다 이러면 너는 버려질 것이다라며, 외로움을 느껴 그 빈곳을 자연스레 채우려 사회속으로 들어가 생존을 하고 번식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성간의 연애감정과 사랑이라는것도 마찬가지이다, 종의 진화와 번식 발전을 위해서 프로그래밍된 알고리즘일뿐이다 이런 것들에 내 에너지를 굳이 낭비할 필요는 없다 현대는 아니 내가 사는 이곳은 일정수준의 노동을 댓가로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는 세계이고 외로움, 번식, 성욕같은것은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게 되었다. 인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으며 성은 쾌락이 되었고 그 이상의 의미는 예전에 비해 많이 퇴색되었다 굳이 섹스가 아니더라도 수정을 할 수 있으며 인공적으로 태아를 수정할 수 있는 세계이니 원시의 시스템은 지금 내게 통용되지않는다. 이러한 낡은 감정들에 휘둘리는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하나 사랑은 중요하다 단지 이성에게 느끼는 성욕과 나의 트라우마를 위로받기 위함 이라던지 나의 인간성 나의 나약함을 채우기 위한 목적의 사랑이 아니라 범적인 사랑이다.  사랑이라 함은 측은지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측은지심이라 생각하며 공감이라 생각하고 너가 아파서 내가 아프니 너를 행복하게함으로써 나도 행복하자는 이기심의 발로이자 우리 모두가 저러한 부정적이고 낡은 감정들에 나를 쏟지 아니하고 긍정적이고 더욱 더 활기찬 모습으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갈 의지를 부여해준다고 본다. 사랑은 희망이며 인간종 실존의 이유이지않을까 생각한다.   사랑은 인간 감정중에 가장 생산적인거다 자  나는 사랑에 트라우마가 깊다.  트라우마라 함은 결국 내가 극복해야 할 대상을 말한다, 어쩔수 없는 신의 계시가 아니고 영원히 작동을 멈춰버린 낡은 기계같은게 아니다. 나를 더욱 높은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게끔 해주는 장치이며 나를 더욱 더 완성 시키는 계기이다.  나는 사랑에 트라우마가 깊다, 나는 남들보다 내가 못하다고 생각하며 못생기고 능력이 없으며 착하지 아니하고 매력이 없으며 이런말을 쓰는것조차 가슴이 아려오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사랑은 나같은 사람은 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느낀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않다.  내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받고 있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않다.  나라는 객체는 세상의 주체로써 존재하지만 나의 욕구들과 욕망들 감정들은 내가 정복하고 지배할 대상이지 나를 휘두르는 채찍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인간이기에 사랑을 받고 싶으며 위로를 받고싶고 섹스를 하고싶고 사랑을 표하고싶고 너를 행복하게 하고싶고 오직 나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너를 가지고싶다.  그렇다 너를 가지고싶다, 뺏기기 싫고 내게만 이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 질투가 차오른다,  이러한 감정의 근원은 어디일까.  내가 말하는 근원은 절대로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오로지 나의 개인적인 기준이며 개인적인 인생에서 나오는 개인적인 트라우마이다.  내가 너를 가지고 싶은 이유는 내가 모자라다고 느끼기때문이다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다른사람이 너와 섹스를하고 있는 모습이 화나는 이유는 내가 저 남자보다 못한 존재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수컷이고 나는 번식의 주체로써 의무가 프로그래밍 된 채 태어나 당연히 그렇게 느끼는거다.    자 그렇다면 질투를 빼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나는 인간이기에 사랑을 받고 싶으며 위로받고싶고 섹스하고싶고 사랑을 표하고싶다.  여기서 문제가 될것이 있는가? 사랑을 받는것은 너가 컨트롤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신경을 쓸 필요가 전혀 없다.  사랑은 받는게 아니다 주는 거다 항상 주는거다 그럼 내게 사랑을 주는건 누구냐? 나다. 자 그럼 문제 없다. 내가 내게 사랑을 주며 나는 나로부터 사랑을 받으니 이것에는 문제가 없다.  두번째 위로받고싶음에 대해서도 똑같다 나는 위로가 필요없다 또 다른 내 속의 나는 위로가 필요하다 항상 필요하다 이것또한 누군가가 제공해줄수없는 문제이다 고로 해결자는 나이며 나는 나를 위로할수있다, 문제 1번과 같은 맥락이다 고로 문제가 전혀 없다.  자 세번째 섹스를 하고싶다 뭐 이것도 1번 2번과 비슷한 맥락이지만 섹스라는것도 글쎄 내가 못해본것이라 그렇게 느끼는거다 사실 잘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나는 사랑을 하고싶은거고 사랑을 받고 싶은거고 그 표현방식의 일종으로써 느끼는 바이지 사실 나는 섹스를 그렇게 좋아할 정도로 겪어보지 않았기 떄문에 이것은 착오이다. 고로 문제가 없다. 네번째 사랑을 표한다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언제든지 표할수있다 단순히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게 아닌 행동으로써 상대방이 감당할수있는정도 내가 감당할수있는 정도를 계산하며 표현을 하면 되는 문제다, 여기서 오는 모순은 보상심리이다 내가 이만큼 너를 위해줬으니 너도 이만큼은 나를 사랑해줘라고 하는 거래심리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행위는 과연 사랑에 있어 괜찮은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거의 권기범(지인)이다.  물론 이러한 심리에 잘잘못을 따질수는없다 내가 누구라고 판단을 하겠는가 나는 오직 나의 감정과 나의 사상과 주관적인 나의 모든것을 판단 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가 있을뿐 일종의 아이디어에는 내 이름표를 붙여 판단을 내리는건 굉장히 오만한 일이다.  판단이라 함은 내가 옳다라는 것을 가정을 하고 있으며 (물론 여기서 판단이라는 행위자체가 내가 옳다는것을 가정한 행위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내가 옳은지 그른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연구라던지 학문이 아닌 영역에서 내 멋대로 진리라 발표하는것만큼 모자란 짓은 없다 고로 보상심리에 대해서는 나는 선악경중 등을 가리지않겠다.  다만 나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 인간이 되고싶기에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너도 이만큼 해줘라고 강요하지않겠다  물론 자발적으로 그만큼 해준다면 거절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그만큼 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나쁠일도 없다, 그건 상대방의 몫이며 내가 왈가왈부할수있는 문제가 전혀아니다.    자 그렇다 함은 상기의 네가지의 나의 욕구에 있어 문제가 될 것은 하나도 없다 동의하는가?  아무래도 완벽한 동의는 쉽지않은 것 같다  나는 아직 마음 한구석이 아프다, 내가 나를 더 돌봐줘야하는데 나는 아직 어려서 방법을 잘 모르겠다.  내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될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나는 항상 주기만했다 라는 생각에 그저 슬프고 억울할 뿐이다 남들은 그리도 받았는데 왜 나는 주기만 하는가 라는 억하심정과 울분이 느껴진다, 그러한것들에는 초반에 설명했듯 내가 그저 그사람들에게 아니었을뿐인건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인지한다고 한들 받아들이지 못해 나의 나름대로 논리를 짜고 이유를 찾아 이해하려고 했던 시도가 나의 열등감으로 발전을 했다 왜냐하면 내게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내가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데 네가 나를 사랑하지않을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하지만 감정을 아직 초월하지 못한 동물이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결국 본성의 영역에서 사람은 감정과 본능에 따라 움직이게끔 프로그래밍 되어있고 이를 뛰어넘는 방법은 오직 지성뿐이나 세상에 지성의 빛을 본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않다. 그래 억지로라도 나를 치켜세워주자면 나는 가지적인 세계의 문을 열었고 남들보다는 조금은 위에 있을지도 모른다, 고로 나는 인지해야한다 그들은 인간으로써 당연한 선택을 하였고 그 선택에 있어 나의 실존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자   객관적으로 보자 나는 모자란 점이 존재하는 사람이다. 나약한 사람이고, 고통받는 사람이다 허나 그렇다 한들 내가 한 객체의 생명,동물,인간으로써 자격이 모자란 존재는 절대로 아니다. 나는 분명히 살아있으며 나는 분명히 지성을 가지고 있고 나는 분명히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단지 조금은 나약하고 조금은 고통에 민감하며 조금은 사랑에 민감할 뿐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문제점을 오로지 내게서 만들어 찾는 행위가 열등감의 씨앗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나의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열등감이란 무엇인가 열등감의 정체는 내가 저들보다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는것이다, 그 이유야 만들어 붙이는대로지만 근본은 그러하다  본질적으로 내가 더 잘나고 싶다는 욕망의 뒤틀린 표출이며 나의 경우 이유가 없어보이는 나의 실패와 상처들에 이유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합리화 작업이었다. 그렇다면 열등감은 일종의 연료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자, 본질은 내가 저새끼보다 더 멋있고 싶다는거다. 이 열등감이 문제가 되는 점이 나는 할 수 없다 라는 의지가 깃들기 떄문인데 내가 할수있는지 없는지는 신도모른다 지금은 할수없는것도 1년이 지나면 할수있을거고 물론 누군가는 태어나면서부터 할수있었던것들일수도 있고 누군가는 동시에 시작했으나 일주일 아니 하루만에도 할수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모습을 보면서 또 다시 열등감을 느낀다 왜냐면 저들과 내가 다른점이 분명히 없건만 나는 뒤쳐지고 저들은 앞서나가는것이 내가 모자란 존재인게 분명하다는 사고회로이다.  객관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사람은 모두 다르다 왜 다른가 사람은 왜 모두 다른것인가, 달라야 할 이유가 있을거다.  일단 유전성이 다르다, 유전이라 함은 인간존재 이후 쌓여진 데이터마인이고 행동패턴인데 인간의 본성이라는것은 전 인류가 공유하는 것으로 종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떠한 개체의 특수성이 아닌 종의 특수성 예를 들어 고양이의 연골조직이라던지 개의 구강구조처럼 그저 인간의 특성인것이다 인간의 본성이라함은.  동물도 그 어떠한 식물도 모두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라나고 다른 속도로 자라나고 다른 삶을 살아간다  정말로 우주에 완벽하게 같은것은 존재하지않는다. 정말로 우주에 같은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미시적인 세계에서 분자구조는 다를수밖에없다, 고로 우리는 모두 다르다. 단지 인간종일뿐이다, 그렇다하면 예를들어 내가 정말로 모든것에있어 열등하다고 한들(이 단어를 쓰는것조차 사실같아서 가슴이 아리다) 그저 특성일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의 유전이 좋지 않은가보다 하고 넘어갈 문제이지 의미를 부여할 필요 조차 없다. 유전이 그러한것을 *** 뭘 어쩔것인가 그래서 나의 생김새나 나의 특성들에 대해 인식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그냥 그런 존재인거다 오리너구리처럼 그냥 별 이유없다 그렇게 진화해왔을뿐. 또 환경과 인생이 다르다. 나는 가난하게 자랐고 아직도 가난하며 당분간도 가난할 예정이다. 가난을 겪어 보았는가? 가난은 정신을 좀 먹는다. 자 여기 완벽하게 같은 개체가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고 가정을 해보자 한명은 가난한 집 한명은 유복한 집, 다른 조건들은 동일하다고 가정하자. 가난은 사람을 몰아세운다, 항상 부담감에 눌려있는 부모가 웃기란 쉽지않을것이며 가난속에서 자란 나는 행복을 잘 모를 수 있다 가난이 행복하다는것은 그냥 판타지다 기생충을 봤는가? 그게 가난이다 나는 기생충을 보다가 단 한순간도 욕을 안한적이 없으며 매순간순간 지난 나의 트라우마들을 되새김했으며 송강호가 이선균을 죽였을때에는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단순히 영화로 받아들이는 모든인간을 불태워버리고싶었다. 그것이 가난이다. 가난은 차별이고 가난은 너무나도 죽음이며 가난은 정신을 좀 먹는다.  반대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을 만난적이 있다, 나랑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동경했고 동시에 혐오했다. 우린 절대 가까워 질 수 없었다 그는 나의 열등감이나 지식과 사랑, 행복에대한 과도한 집착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겐 사랑과 행복은 당연한 것이며 지식은 그저 지식일 뿐이었으므로, 그는 밝았다 너무 밝았다, 내게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문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실제로 대수롭지 않게 해결했고 나는 그 문제를 풀지 못했다. 그는 항상 밝았다 사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진심으로 행복하고 진심으로 밝고 진심으로 나를 안타까워 했고 진심으로 나를 불쌍히 여겼기에 죽여버리고싶었다.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다 뭐 항상 여자이야기인거 같은데 그만큼 이성은 내 정신에 가장 큰 덩어리를 남긴 문제이다. 그여자는 뭐 역시나도 나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를 나는 그에게 상담을 자주 했으며 그는 대수롭지않게 아냐 너도 괜찮은데 잘 될거야 그냥 너무 니가 진지해서 그래라고 했다, 아마도 다 맞는말인거같지만 나는 받아들일수가 없었고 그로부터 얼마뒤 그는 그여자랑 4년을 사귀었다. 당시 나는 그의 바로 옆방에서 살았는데 밤마다 둘이서 내는 소리는 잊혀지지가않는다 물론 이 비슷한 경험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어릴때 6명의 형들과 작은 집에서 같이 살던 나는 형들이 여자친구을 데려올때마다 밖으로 나갔어야 했으며 우리는 매우 가난했기에 어떨때는 나는 옷장에 들어가서 자고 형은 여자친구와 방에서 섹스를 했다. 난 절대 보지않았다 보지않은것에 대해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냥 옷장속에 구겨져서 왜 나는 저렇게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을까 라고 자책하며 음악으로 소리를 막고 그들이 일어나 밖으로 나갈떄까지 옷장에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절대 이해하지 못할거다. 물론 좋은 예가 아니지만 환경이 인간의 특성에 영향을 미친다는것에 대해 반론을 표할 사람은 없을거라 믿는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환경에 따라 습득하고 적응하는게 본성이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가난하게 자란 나는 모든 것을 내탓으로 돌리려는 성향이 있었고 유복하게 자란 그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았다. 내게 사랑이란 신이 내려준 보석같은것이며 그에게 사랑이란 당연한 것이었다. 내게 돈이란 생존이었지만 그에게 돈이란 권리였다. 환경이 나를 바꾸어 지배했다, 아직도 이 기억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아무리 이성으로 나를 객관화하고 이러한 글까지 써가면서 내 정신을 뜯어 정립하려 해도 기억에서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다. 아직도 나는 아프다, 다만 아파하는것을 포기했을뿐. 내게 가난이란 그러했다. 그런데 또 누군가에겐 가난이란 연료였다 촉진제였으며 그는 지독한 가난이 싫어 모든것을 바쳐 더 높이 올라가기위한 연료로써 사용했고 가난을 극복했다, 내게 가난이란 아픔그자체인데 그에게 가난이란 그저 한 스테이지였을뿐이었다. 물론 그의 가난과 나의 가난이 같을 수는 없고 내게는 고통받으며 혼란스러워하는 부모님이 있었고 그에겐 안쓰럽고 지켜야할 부모님이 있었기에 그는 어른이 되어야했고 나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 이렇게 환경은 개개인마다 구구절절하게 다르고 인생또한 그러하기에 인간은 절대로 같을 수 없다. 서로 완벽하게 다른 시간들을 살아왔기에 어떠한 재능이든 무엇이든 완벽하게 다르기에 굳이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내 상황에 있었다면 나와 달라졌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만약 내가 그와 같은 상황에 있었다한들 그와 같이 가난을 극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만약 내가 유복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지금과는 다를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내 열등감이니 사실이라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 고로 우리는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모든 존재가 서로 다른데 왜 굳이 굳이 열등감을 선택해서 느끼는가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의 본질은 열등감과 피해망상이기에 뭐라고 말 하기가 쉽지않다.  열등감이라는 것은 형체가 없는 허상이며 내가 만들어낸 괴물이다, 진정한 사실은 모두는 다르기때문에 잘하는게 다른거고 잘하는게 없다고 해도 그저 그런 특성인것이기에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면 된다 그저 그뿐이다. 하는 만큼 익숙해진다. 상처도 받는 만큼 무감각 해지고 인간은 성장을 멈출 수 없다. 모든 생명의 종착지는 죽음이며 향해 가는 길은 그저 과정일 뿐이다, 그러니까 열등감도 느끼지말고 아파하지도 말아라 그 모든것은 형체가 없으며 그저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들일뿐이다.  이는 불교의 공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어릴때는 허와 공을 이해 하지 못했다 나는 이토록 가득 차 있는데 어째서 세상이 비어있다고 하는지 혹시 삶이 의미가 없으니 그냥 자살하라는건지 싶었다. 이제는 조금은 이해 할 것 같다 물론 이 또한 진리라 말 할 수는 없고 그저 내 생각일 뿐이지만.  우리는 세상을 오감으로 받아들이며 받아들인 정보들은 내게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사랑이든 슬픔이든 우울이든 우리는 얄팍한 지성을 가지고 있어 현상을 판단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능력으로 우리는 세상을 재단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저 세상이다 선악도 없으며 그저 존재하는 세상이고 왜 어째서 존재하냐는 의문조차 의미를 잃어버릴 정도로 그저 존재한다 그에 의미를 부여하고 선악을 구분짓는건 우리다. 사실은 모든게 형체가 없다, 저 나무는 그저 나무일 뿐이며 그저 원자덩어리다, 저 원자덩어리를 내가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나의 의지다, 저것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나의 의지다. 나의 의지가 없으면 저건 나무가 아니다 그냥 덩어리다, 나무라는 이름을 붙인것부터가 우리인데, 보잘것없는 나무마저 그럴진대 더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것들은 무슨 형체가 있겠는가 그냥 우리가 다 부여한 것들이다 절대로 진리가 아니고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세상은 비어있다 우리는 죽는다, 세상을 뭘로 채울지는 내가 정한다 그게 열등감이라면 열등감이 될것이고 그게 사랑이면 사랑이 될것이고 그게 죽음이면 죽음이 될것이다. 그래 세상의 주체는 나다, 타인도 마찬가지며 다른 모든 물질들이 마찬가지이다. 나는 진시황을 존경하지만 사실 진시황은 사이코패스다. 나는 조조, 이성계, 이순신을 존경하지만 그냥 살인을 굉장히 효율적으로 한 사람들이다 히틀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징기스칸과 히틀러의 차이점이 뭐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정의를 부여하는건 남아있는 사람들이고 인종학살은 인간사내내 계속 이어져왔으며 차별은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다. 세계를 만드는 건 나다. 세계를 죽이는 것도 나다. 세상이 나다. 그러니 열등감을 굳이 느끼지마라, 굳이 애써 슬퍼하지마라. 너가 슬퍼하는 건 너의 이상이 너무 높기 떄문이다, 너가 성장을 멈춘것도, 너가 포기한것도, 너가 아픈것도 네가 바라보는 곳이 너무나도 높기때문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아무도 거기에 닿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너는 거기에 닿을 수 있다. 만약 닿지 못한다면 뭐 어쩔텐가 우리의 종착지가 죽음인것을 너의 이상을 이루었다고 죽음이 너를 찾*** 않을 이유도 없으며  이루지 못했다고 죽음이 너를 기다려 주지도 않을거다. 그저 사랑하면 안될까, 세상을 놀이터로 만들면 안될까? 그게 안되는 이유가 있을까? 물론 사회가 놀이터가 되긴 쉽지않을거다, 내 세상뿐만아니라 타인의 세상도 변화를 시켜야하니까, 근데 안되는 이유가 있나?
지금 앱으로 가입하면
첫 구매 20% 할인
선물상자 이미지
따옴표

당신이 적은 댓글 하나가
큰 힘이 될 수 있어요.
댓글을 한 번 남겨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