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비공개·3년 전
저는 말을 잘 합니다.
생각이 항상 논리적으로 정리되어 있어 말에 두서가 있고 군더더기 없다는 평가를 많이 듣습니다.
독서를 좋아해서 어휘력도 좋고, 글도 조리 있게 쓸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잘 합니다.
하지만 대화는 못 합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제가 누군가와 대화할 때 말을 더듬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걸 깨닫게 되고 저는 놀랐습니다. 저는 스스로가 말을 더듬는 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상했던 건, 제가 어떨 때는 말을 더듬거나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는 반면, 어떨 때는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매끄럽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어떨 때 말하기가 힘들고, 어떨 때 편한지 분석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쉬울 때
-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할 때
- 토론이나 토의를 하는 등 정해진 주제로 대화할 때
- 말할 내용과 자료를 준비하고 그대로 말할 때
- 사실과 정보를 전달할 때
어려울 때
- 1명이나 2명 등 적은 인원과 대화할 때
- 주제가 정해지지 않은 수다를 떨 때
- 준비하지 않은 내용을 말해야 하는 대화를 할 때
- 내 느낌이나 감정, 마음을 말해야 할 때
그러니까 공식적인 발표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저는 눈을 심하게 깜박이거나, 말을 더듬고 말꼬리를 흐립니다.(ex: “저는 ~~하기 때문에 ~~하다고... 네...”처럼 중간에 말을 끊고 급하게 마무리함. 대화 중에 한 문장도 끝까지 말을 하지 못함)
또 갑자기 쓸데없는 말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거나 ‘어....’라고 하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합니다. 그리고 수다를 떨다가 하려던 말을 못 하고 주제가 전환되면 그 주제에 집중을 하지 못합니다. 앞뒤가 심하게 다른 말을 할 때도 있고, 무엇보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집니다. 대화를 하려면 상대방이 온 신경을 곤두세워 제 목소리를 들어 주어야 합니다.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는 목소리도 크고 또박또박해서 듣기 좋다는 평가를 받는데, 유독 사적인 대화를 나눌 때는 목소리가 작고 하려는 말의 요점이 드러나지 않아 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저에게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하기가 힘들어 그냥 적당히 웃음으로 상황을 넘깁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웃기만 한다며 지적하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하는 도중 누가 질문을 하면 모르는 질문에도 적절한 말로 막힘없이 대답하는데, 왜 1대 1 대화 상황에서는 대답하는 게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대화 중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내려다보거나 상대방의 목 또는 가슴 언저리를 보며 말하는데, 가끔 눈을 마주쳐야 할 때는 온몸이 경직되고 불안해집니다. 그렇게 눈을 마주치는 것을 어려워하다 보니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래서 자주 만났던 사람임에도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성격이 특별히 내성적이지는 않은데, 어릴 때부터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늘 혼자 지냈습니다. 유치원에서도 놀이 시간에 혼자 앉아서 책을 읽거나 땅을 파거나, 혼자 구석에서 가상의 친구들과 놀고 있었습니다. 가상의 친구들에게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편했고, 10대 초중반이 된 지금도 가상의 친구들을 끝없이 만들어내 그 친구들과 놀고 있습니다.
제가 소수와 대화할 때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대화하는 것이 어려우면 6년이나 남은 학교 생활, 평생 이어가야 할 사회 생활은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걱정이 되고 불안합니다.
가족들과도 대화가 원활하지 않아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로 이런 문제를 말할 곳이 없어 이곳에 올려 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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