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죄책감이 밀랴와요 - 익명 심리상담 커뮤니티 | 마인드카페[공황|부부|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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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죄책감이 밀랴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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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저는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아니아면 조금은 유별나다 라고 할수도 있는 34살 외식업 종서자 직장인 입니다 부모님과 저 그리고 9살 많은 오빠가 있는 흔한 가족 에서 제가 3년전에 결혼을 하여 분리가 되었고 드디어 저의 삶을 살아갈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저의 마음 한구석에는 결혼으로 도망을 가려 하였고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5살때부터 25년동안 친오빠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고 친오빠는 언젠가부터는 폭력을 부모님에게도 가해졌습니다. 그때 마다 모든 원망이 원인은 제가 태어나던 해쯤에 아버지의 사업이 크게 부도가 났고 저때문이고 아버지 때문이라고 폭언울 받았습니다 물론 아버지 사업으로 인해 부유했다가 한순간 알거지가 되어서 오빠는 왕자에서 벼락거지가 된꼴이였을테고 남부럽지 않음 그 연배의 스펙과 음대 나온 음악선생이자 사모님 선생님 소리 듣더 엄마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였죠 아빠는 머리 좋은 가난한 부산청년이던 시잘 엄마를 만나 고생시킨다는 그져 죄인 같은 심정과 책임감때문에 장인어른의 배신으로 인한 결정적 부도였어도 지금까지 속죄하듯 묵묵히 지켜온 가정이였나 봅니다 사실 저는 기억이 안나지만 꽤 부유했었나 봅니다. 기껏 해봐야 만 1살 겨우 넘었울 테니 알리가 있나요 사업에 실패해 도피하듯 온 가족이 타국인 싱가포르에서 10년 살았고 전 초등학교 1학년때쯤 다시 한국으로 엄마와 먼저 입국하고 몇년뒤에 아빠 오빠가 들어왔습니다. 첫 기억은 5살쯤에 집 외부 발코니애 반나절을 갇혀 있었고 부모님이 퇴근 하실때쯤 열어줘서 나올수 있었습니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은 단순 사춘기일거라는 믿는 아들을 의심하지 않았고 어렸던 전 단순한 말로 “오빠 이상해” , “오빠 무서워” 라고 말했지만 ... 묵살 되었습니다 부모님 그들도 너무 바쁘고 지쳤기에 들리지 않았답니다 한국에 들어와 한국어도 못하던 8살인 나는 음악선생이던 엄마의 바램과 욕심으로 음악에 길에 질질 끌려가고 있었고 수많은 제자들과 비교를 당하며 기대에 못 미치면 어김없이 혼나다가 반항하는 저는 결국 맞았습니다 부모인 엄마에게 맞는게 무슨 대수롭다 하겠지만 개패듯 맞았습니다. 그것도 안되면 부모 대신은 형제인 오빠라고 오빠가 저를 훈육하도록 엄마가 지시하였고 전 본격적으로 그때부터 매일같이 음악하기 싫다고 반항하고 싸우고 혼나고 결국 훈육이란 단어로 개시장에 개마냥 맞았습니다. 아빠는 뭐하셨냐? 아빤 다시 회생하려 미친듯이 일하셨고 한달이 3번 이상이 해외출장이였습니다. 아빠가 출장 가는 날은 저의 장날 이였습니다 꼼작없이 엄마에게 질질 끌려서 하고 싶지 않은 음악을 해야 했고 반항하면 친오빠에게 개패듯 맞았습니다 그렇게 수없는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고 점점 더 날이 갈수록 횡포를 쓰는 강도는 쎄졌고 폭력이 권리라고 착각하는 친오빠를 부모님들도 감당을 못하고 막지도 못해 종종 셋이서 잠시 피신하고 하루가 무사하길 바랄뿐 도망갈수도 버릴수도 없는 존재를 ....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또 부모님이랑 오빠랑 싸우다가 부모님도 맞는걸 말리다가 불똥이 튀어 내가 맞고 도망가지도 못하게현관앞에서 막아 서서 감금아닌 감금 으로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때까지 물질적이든 감정적이든 끝장을 봐야만 했어요. 그렇게 가랑이가 찢어지도록 친오빠에게 모든걸 해 주었어도 그는 과했고 무리하게 요구만 해왔고 그게 안되면 집안에 물건이건 사람이건 멀쩡한게 없었죠 제가 한 고등학교때쯤 참다 못해 경찰을 불렀지만 그때 당시 가정폭력에 대한 개념도 무지하여 경찰도 ... 심지어 부모님도 ... 대충 집안일이라며 마무리지어 보낸 후 저는 경찰을 불렀다는 이유로 저는 세상에 둘도 없는 ***년이 되었고 어느날은 부모님 없을때 골프채로 몇시간을 맞았는지 기억도 안나 맞는 중간 몇번 몇초에 동안 정신을 잃었고 온몸을 피멍과 심한 통증과 퉁퉁 불은 팔과 다리로 몇달을 절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매일 맞고 사는데 어떻게 음대를 가라는거였는지 지금 생각해도 의문이며 그 후유증으로 손가락은 미세하게 절며 종종 가끔 심한 통증이 있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미세하고 섬세한 일 ,작업등의 손으로 하는 건 어렵다고 해야겠죠 그래서 음대고 나발이고 오히려 잘됐다 싶었어도 오래동안 혼자 꿈꾸던 미대를 갈수가 없게 되었죠 그런 날들이 반복이 되고 전 대학진학도 포기하고 성인된 후로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최대한 늦게 들어가고 최대한 빨리 출근하러 나왔습니다. 쉬는날도 길에서 자는 한이 있어도 난 ... 집에 있을 수가 없었고 그냥 밖에서 쉬는 날을 보내기도 하고 너무 힘들면 혼자 모텔에서 외박하기도 했습니다 또 언제 집이 뒤집혀지고 내게 불똥이 튈지 모르니까 ... 독립을 생각 안한건 아니였습니다. 현실적으로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을수 없어도 어떻해든 나오고 싶었으니까요 한때는 이렇게 맞다가 죽으면 끝날까 싶다가 이게 무슨 개죽음을 내가 왜 그래야 하나 싶어서 어떻게든 버텨야 했습니다 . 근데 막상 나오려 할때마다 부모님을 어찌 할수가 없었습니다. 아빠는 엄마를 설득하여도 엄마의 빌어먹을 모성애때문에 어쩌지 못하더라구요. 하긴 오빠 군대 가는데 눈물 한방을 안 흘렸다고 집앞 놀이터에서 등짝을 맞고 밤세도록 혼났습니다. 그때도 지금 생각해도 기가막힌 일이였어요. 드디어 괴물이 잠시라도 사라졌는데 만세를 불러도 부족한데 ... 그런 엄마에게 아들은 패륜아 일지라도 버릴수 없는 존재라 현재 까지 저를 괴롭히겠죠 그렇게 전 어찌저찌 집이란 마음 둘 곳 없이 떠돌이 개마냥 일이라는 면목으로 밖으로 겉돌고 피론함을 사서 술 취해 잠만 자러 집이란 곳이 와서 잠을 청해야 겨우 잘수 있었습니다. 도져히 잠들수 없고 잠들면 악몽에 시달리거나 친오빠에게 시달려야 했었어요 어쩌다 부모님이랑 저는 외할머니댁에서 2년을 지냈지만 치매이신 외할머니와 지체장애인 외삼촌의 알수 없는 괴성도 힘들긴 했으나 그나마 친오빠보다는 나았던거죠. 이 시간들을 지내면서 수없이 방황하고 나름 어쩌면 남들과 비슷한 고민들도 하고 비슷하게 연애도 하고 친구도 만나보고 이른 사회생활과 직장생활도 하며 살아보려 애썼던 같아요 . 애써서 부모를 이해해 보기도 하고 친오빠인 그도 이해해 볼려고 용서라는걸 해볼려고도 노력해봤어요. 어쩌면 별거 아닐거라고 스스로 자위하면서요 . 물론 소용없었죠. 그 사이 그는 어마어마한 괴물이 되었고 심각성을 느끼셨던 부모님이 친오빠를 병원에 검사를 해보니 조울증 강박 등등 무슨 정신과 치료와 약물치료 를 애썼지만 약은 약대로 버려버리고 병원도 안가고 너무 심각해졌을때 결국 강제 입원까지 해봤지만 모든 의사들이 두손두발 다 들었답니다 . 남편과의 연애 5년반만에 결혼을 하였고 연애중에 내색할수도 말할수 없어 애써 감추고 감추다가 몇년후 결국 마음이 깊어지니까 죄책감같은 비슷한 감정에 결국 헤어질 각오를 하고 자초지경과 집안의 모든 일을 고백 하였고 평범한 집에서 평범하게 해맑게 자라온 남편은 큰 충격을 먹었지만 곁에서 묵묵히 함께 해주었습니다 어찌저찌해 결혼을 하여 보통의 맞벌이 신혼부부 로 1년이 지날무렵 아빠가 아버지가 .. 쓰러졌다고 연락이 오더라구요. 뇌경색으로 급하게 수술 하였지만 후유증이 너무 크게 남아서 오른쪽 편마비로 인해 거동을 할수 없고 언어장애와 약간의 인지 장애를 얻게 되었습니다 . 만2년이 다 되가는 지금 ... 그때는 아빠가 걷지 못해도 말하지 못해도 날 알아보지 못해도 괜찬다고 살아만 있어 달라고 애원하듯 남몰래 울며 밤을 지내던 날들이였네요 그런 마음도 나도 어쩔수 없는 간사한 인간인가 싶은게 아빠가 그동안 겨우겨우 커버 하고 있던 막이 터졌다고 해야 하나 ... 엄마의 불안정함과 억지를 저한태 다 퍼붓기 시작하더라구요. 그 동안도 엄마에 대한 원망은 이미 차고 넘쳐도 같이 맞설수도 없고 당장 눈 앞에 현실적인 문제부터 터져버리는데 그 수습을 하든 도와서 하든 일단 이 상황을 수습 해야만 했어요 . 처음 6개월이 정말 정신이 없었고 잠도 못자고 일 병원 집을 반복하고 나머지 6개월은 엄마랑 크고 작은 문제들로 계속 싸우게 되는데 제일 큰 이유는 친오빠 입니다 . 그렇게 모든 특권을 누리게 해준 부모는 그져 돈 나오는 기계이며 매일 매일 아니 한시간 두시간에 한번씩 만원만 하는 불혹에 아들을 감당하시기 어렵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전 그 하소연을 제발 이제 정리하고 각자 살자고 해도 현재 거주하는 집에 대한 그 친오빠의 집착과 엄마의 20년된 집을 처분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불안함이 뒤엉켜 변덕을 부리며 저에게 한번에 쏟아내고 있습니다 . 물론 지금도 말도 안되는 어거지와 요구가 안되면 폭력을 행하려 하고 작은 손짓에도 휘청하시는 나이가 된 엄마는 아직도 아들에 대한 잘못된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를 용서하고 지내라고 강요를 하더라구요 이 와중에 아빠는 한순간 갓난쟁이 애기가 되었어도 딸인 저를 알아보고 저에게만 웃고 저에게만 떠듬떠뚬 단순한 말 몇마디를 건낼뿐 정말 ... 아무것도 할수가 없죠 그런 아빠를 보며 내가 왜 여태까지 안미치고 머리가 획 안 돌았을까 생각해 보니 어쩌면 아빠 였나봅니다 나까지 돌아버리면 아빠는 진작에 아마 떠나셨을 것 같아요 그 힘든 시간을 지켜주지 못해서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이렇게 커서 결혼준비도 혼자 하게 해서 미안하고 고맙다고 결혼전에 말씀하시던 눈으로 지금도 저를 바라보며 손을 꼬옥 잡고 이름만 부르며 제 얼굴을 매 만지시네요 어느날은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아빠가 쓰러지셨을때 잘못되었다면 나는 오래 슬펐고 후회도 하겠지만 지금 엄마랑 친오빠를 안보고 살수 있지 않을까 ? 아빠를 볼모로 잡아 놓고 이리저리 뒤 흔드는 엄마에게 벗어날수 없을까 ? 연락을 안받으면 내 집으로 내 직장으로 찾아오고 남편에게도 무한 연락을 보내기도 했었고 제가 정말 화가 나서 연락을 안 받고 싶어도 결국에는 연락을 받고 할수 밖에 없는 나약한 마음이랄까요 ?! 이러지도 저러지고 결국 난 또 모질지 못하게 끌려다니는 군아. 이게 자식된 도리이라면 난 어디까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견뎌내야 하나 싶어요 어떤날은 도망치려 한 결혼에 다시도망치려 이혼할수도 있겠구나 싶더라구요. 그런 절 알고 남편은 허튼 생각 말고 너무 힘들면 제발 친정에 가지 말라고 합니다 . 그 말이 당연한 입장인데 괜시리 참 슬프더라구요 . 친정집에 대한 그리움보단 불안이 더 큰 사실이 ...조금은 서글프더라구여 그렇게 버텨온 저에게도 언젠가 부터 몸이 이상징후가 있어 온갖 병원과 검사를 하면 모두 정상으로 나오다가 또 한날을 이빈후과에 가서 목이 자꾸 안에서 매이고 코가 눌리는 기분이며 뭔가 자꾸 숨이 잘 안 쉬어진다 했더니 저보고 신경정신과나 가까운 정신과에 가보라고 합니다 공황장애 증상인듯 하니 가서 상담을 받으라 합니다 근데 내가 ? 에이 말도 안되 하면서도 내심 겁이 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도 진짜 나도 모르게 지친걸까 싶네요 . 이 굴을 쓰면서 드는 스친 생각은 전 누굴 원망했던 걸까요 그리고 저는 벗어나려 할수록 결국 제가 내발목을잡듯이 죄책감 아닌 죄책감 같은 감정 때문에 묶여 있구나 싶네여 이겨내고 견뎌왔다고 착각했고 스스로 마음에 병이 점점 차올라다 증발해버린 것 같은 제 솔직한 심정은 이제서야 어떻게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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