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셨다. 도수 16.9%의 무색 투명한 액체 - 익명 심리상담 커뮤니티 | 마인드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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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술을 마셨다. 도수 16.9%의 무색 투명한 액체. 강한 알콜향으로 맡자마자 거부감이 밀려오지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냄새를 잘 못 맡는 사람이 아니다. 고르고 골라서 단정한 단어를 내뱉는 모습만큼 예민한 사람이다. 가끔은 냄새때문에 구역질을 할 정도로 참 피곤한 사람이기도 하다. 우스운 일이다. 얼마나 예민하면 이렇게 피곤하게 사는 것인지. 나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얘기하자면, 학창시절엔 단 한번도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담배도 술도 남들이 말하는 소위 '나쁜 일'과는 지구와 태양 사이만큼 거리가 멀었던 아이였다. 공부도 잘하고 품행도 바르며 단정한 외모에 고운 말씨. 그래서 아무도 내 안에 어떤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정말 훌륭한 배우였으니까. 가끔 어리고 미숙해서 차마 감추지 못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 사람들이 너무 끔찍하고 무서웠다. 동족혐오. 웃는 모습이 거짓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똑같이 거짓으로 웃는 사람이니까. 수없는 고통의 시간을 거쳐서 나는 이렇게나 자랐다. 오래 일한 직장도 있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술을 마신다. 적당히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도수 16.9%. 문득 뒤돌아본 나의 인생길이 애틋해서, 위로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내가 안쓰러워서. 기댈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 아랑곳않고 짓누르는 책임, 무게, 상처 그리고 역할만 주어진 이름없는 나. 숨을 내쉬니 알콜향이 느껴진다. 이 냄새가 그리 나쁜지 나는 잘 모르겠다. 잠깐이라도 웃을 수 있다면, 잠시 눈을 가리고 편해질 수 있다면. 그거면 되었다. 그래, 인생이 쓰니까 술이 달다. 오늘도 나의 인생을 안주삼아 한 잔 들이킨다. 코끝이 알싸하고 혀가 찌르르한 느낌, 목을 타고 흘러서 느껴지는 씁쓸한 단 맛. 어쩌면 이게 인생인걸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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