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 상처를 드릴까요. 그냥 저 혼자 문드러질까요. - 익명 심리상담 커뮤니티 | 마인드카페[우울증|왕따|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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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상처를 드릴까요. 그냥 저 혼자 문드러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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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저는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쪽 친척집을 전전 하며 자랐습니다. 친척 언니 오빠 동생들은 각각의 부모들에게 지극 정성 돌봄을 받으며 금지옥엽 자랐고, 저는 어딜가나 눈엣가시처럼 자랐습니다. 손을 베였다고 밥통으로 머리를 얻어 맞고 그 뒤로는 상처가 생기면 세상 무너지는 심정으로 산에 올라 쑥을 빻아 지혈 하곤 했어요. 밥상에 생선이라도 올라오는 날, 제가 손을 대면 심장이 찔릴 것 처럼 노려보는 눈초리와 번개처럼 멀어지는 생선 접시인걸 알기에 늘 식구들이 먹다 남긴 뼈를 씹어먹었고, 사촌들이 과자를 먹을 땐 그 옆에 앉아 비어가는 접시를 보며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어요. 이것들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저학년때까지의 일부 입니다. 아버지의 역할은 식구들이 제 욕을 하면 올라와 잡아 패고 욕을 하는게 전부였지요. 중학교 때는 매주 김치고 먹을 거리를 싸들고 두시간 거리 아빠 댁에서 집안 일을 해드리고 올라왔으며 방학 때는 아예 아빠 집에서 가정부로 상주 했지요. 집안 일만 하면 다행이게요. 뭔가 수틀려 들어오시는 날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욕을 얻어먹었고, 크게 기분 나쁜 날에는 싸대기가 날라왔고요. 아빠 퇴근 시간만 되면 심장 쿵쾅 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에 방학이 끝날 때 쯤에는 자폐아 수준으로 말도 못 하고 그저 방바닥만 쳐다보며 아빠 출근 시간만 기다리곤 했습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용돈은 커녕 어디서 얻어온 바지와티 네벌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수학여행은 가보지도 못 했고요. 아,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의 지원으로 한 번 가봤으나 아빠는 모른척 하고 할머니가 꼬깃꼬깃 꺼내주신 1500원 가지고 다녀왔네요. 친구들 3~5만원 들고 휴게소마다 내려 먹을 거 사가지고 돌아올 때 자는 척 하느라 힘들었어요. 그렇게 성인이 되고 아빠 재혼 하시고 새엄마 이간질에 아니 꼭 이간질이 아니어도 아빠 자체가 저를 꼴 보기 싫어 했으니 뭐 꼭 새엄마 탓은 아닙니다. 하여튼 성인이 되서도 머리채 잡혀 길바닥에 끌려나가 발길질에 주먹질에 얻어맞고 울고 있으면 고모네 식구들 우르르 몰려나와 너 때문에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다 손가락질 하고 들어가고 새엄마 나와 울지마 세상에 너보다 불행한 애들 많다며 한 마디 하고 들어가고 그랬네요. 결국 얼마 안 있다가는 새엄마가 저 무섭대서 쫓겨났어요 ㅎ... 고시원 얼마 살다가 고모네.친척 오빠 공장 한대서 무보수로 1년동안 하루 2시간 자가며 일 했고 어릴 때부터 습관처럼 당하던 가족 왕따에 피곤에 밥 먹는 거조차 무슨 거지 빌어먹는 거 마냥 취급해서 일주일 동안 굶었더니 그제서야 놔주대요. 다만 줄 돈은 없으니 몸만 나가래요 ㅋ 아빠한테 50만원만 부탁 했으나 그런 돈 없으니 알아서 하래서 결국 친한 친구 아버지가 도와주셔서 겨우 독립 할 수 있었어요. 근데 독립이라고 해서 직장도 얻었으나 차비고 식비고 없고 친구에게 더 손 벌리기는 염치가 없어 사촌오빠한테 사정 사정해서 3만원 한 번, 2만원 한 번 받은 걸로 새우깡으로 버티도 차비만 겨우 써가며 회사 다니다 차비 떨어지고는 회사도 무단 결근 했어요. 차마 차비가 없어서 못 나간다는 말을 죽도록 창피해서 못 했네요. 집에 하루종일 덩그러니 누워있다가 배가 너무 고픈데 150원이 모자라 새우깡을 못 사먹은 날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 합니다. 근데요. 그렇게 아무것도 없던 아빠가요. 자기 후배들 동료들 겜방비며 당구장비며 밥은 얼마나 잘 사먹였게요. 저 중학교 때 저는 집에 쳐박아두고 부모 없는 옆집 애들 데리고 피서도 다녀오시고, 방황하는 큰 집 사촌 오빠를 위해 큰아빠 큰엄마한테 큰 소리도 내주셨고요. 공장 한다는 사촌 오빠한테는 천천히 갚으라고 빚 얻어서 집도 얻어줘, 소소하게 빌려달라는 돈 다 빌려주고 하다못해 차 타이어 갈아주거나 집 커튼도 바꿔주고 그런 사람이에요. 하여튼 그렇게 20대 초반 때 연 끊었다가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사람답지 못 하게 살면서도 끊임없이 스스로 애 쓰고 치유 해가며 어느 정도 사람처럼 살게 되면서 아빠를 용서하고 다시 연락을 하기 시작 했어요. 그게 삼십대 중반 때였어요. 지금 저는 삼십대 후반입니다. 이제는 아빠도 많이 늙으셨고, 저에게 미안한 마음도 갖고 계세요. 힘들게 사는 아빠가 안타까워 저도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면서 매번 바리바리 싸다 드리고 용돈 드리고 오는데 얼마 전에는 열심히 택시 해서 내년에 대학가는 둘째 뒷바라지 하셔야 한다더라고요. (내년 20살 되는 이복동생이 있고 동생도 여자애예요) 그 말을 듣는데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몰려들더라고요. 내색하지 않고 대화 이어가다가 아버지 지인분이랑 저녁 사드리고 집에 와서 이주가 넘도록 저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제가 결혼 한다 했을 때 (이것때문에 처음에 연락 했어요. 결혼식 없이 혼인신고만 했기때문에 도와달란게 아니라 큰 일이니 연락은 해야 할 것 같았어요.), 집에 큰 일이 있어 우울해 할 때, 남편에게 시달리다 쉼터에 갈 때... 저희 아버지의 첫마디는 늘 '도와줄 수 있는게 없어서 어떡하냐, 도와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 였거든요. 딱히 도움을 바란적도 없었고, 동생 학비 대준다고 왜 난 아무것도 안 해주지 라는 마음도 아닌데 기분이 너무 이상하고 힘든 거예요. 그냥 '아.. 동생은 진짜 자식이구나.' 싶은 기분? 나도 자식은 자식인데 나는 뭐랄까 유전자만 물려준 남 보다도 못 한 어딘가에 존재 하는 느낌... 그냥 모르겠어요... 실제로 지금 아빠가 진심으로 제게 미안해 하세요. 다만 본인이 했던 일, 제가 당했던 일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기억은 안 난다고 하시지만 어쨌든 미안해 하는 마음은 진심으로 느껴져요. (몇 번 서러웠던 일 몇 가지 얘기 했던 적이 있는데 그거 다 기억 해내면 아빠가 죽을지도 모르겠다시더라고요) 하지만 동생에게 느껴지는 자식을 향한 애틋함과는 사뭇 다른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느낌이에요. 지금 가슴이 썩어 문드러지는데 아빠한테 또 구구절절히 얘기 하자니 상처 받으실테고, 그냥 속앓이 하자니 지금 매일 매일 눈물 바람입니다. 이렇게 긴 글에도 제 인생을 먼지만큼 밖에 담아 내지를 못 해요. 이 먼지 만큼과 그 나머지가 제 숨통을 꽉 누르고 놔주지를 않으니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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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오르카l
· 4년 전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고 나아가야 하겠지만 어찌 어린시절의 날아가버린 추억들과 가득 쌓인 상처를 쉽게 지워버리겠나요 이미 일어나 버린 일입니다 마카님이 속으로 묻어두고 기눌려서 지낸것들이 지금이든 앞으로든 얼마든지 트라우마로 나타날거에요 단지 연민때문에 스스로만 피해자로 남지말고 정식상담을 받음과 동시에 아버지와의 모든 문제들을 다시 직면하고 풀어내야지요 시간은 제한되어있답니다 가시고 나면 마카님 혼자서 다 짊어지는거잖아요 살아계실때 풀고 두분 다 안정을 찾으셔야지요 왜 짐을 혼자지고 가시려고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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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o11
· 4년 전
저기요. 다토해내요 아빠한테. 그래도 돼요. ***새끼라고 욕을해도 션찮을판에 아빠가 뭐가 불쌍해요 님인생 망친인간이에요. 정신차리세요. 자식은 무조건 부모에게 효도하는게 아니에요.자식이 어리고약해서 부모가 보호해주고 돌봐주다가 부모자가 늙고약해지면 돌봄받던 자식이 부모를 보호돌보는거라고요. 받은만큼 돌려주는거에요. 정신차리세요. 근데참 천성이 천사신거 같애요. 바보같을정도로